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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감동의 매헌 윤봉길 의사 평화축제

29일 예산 덕산 충의사 일원에서 이틀간 진행

2016.05.01(일) 18:08:26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제43회 매헌 윤봉길 의사 평화축제
 
 

감동의매헌윤봉길의사평화축제 1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충의사 일대에서 29일부터 이틀간 '제43회 매헌 윤봉길 평화축제'가 열리고 있어 계룡도령이 다녀왔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군 대장 등을 향해 폭탄을 던진 '4·29 의거' 84주년을 맞아 그의 애국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는 행사로 사단법인 매헌 윤봉길 월진회가 주관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예산에서 퍼져가는 평화의 울림'을 주제로 윤 의사 영정 모시기, 윤봉길 평화 페스티벌, 평화의 길 걷기, 상하이 의거 퍼포먼스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고 독립운동가 묘표 찾기, 한인애국단 선서식, 장부출가생불환 도시락 만들기, 예술연 날리기 등의 체험 행사가 있어 찾는 이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함께 주는 축제였습니다.
 

감동의매헌윤봉길의사평화축제 2


이날 유달리 바람이 많이 불어 몹시 힘든 환경이었는데 가장 먼저 매헌 윤봉길 의사의 영정을 모신 충의사에 들러 분향하고 축제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감동의매헌윤봉길의사평화축제 3

 
영원한 청년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1908. 6. 21~1932. 12. 19) 의사의 본명은 우의(禹儀)이며 봉길은 별명인데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과 모친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1세 때인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독립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고 합니다.

19세 당시 서당에서 수학하던 윤봉길 의사는 1926년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묘지에서 여러 묘표(墓表)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청년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윤봉길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1927년 [농민독본(農民讀本)]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계몽운동을 벌여 나갔는데 [농민독본]의 구성을 ‘낙심말라’, ‘백두산’, ‘조선 지도’, ‘자유’, ‘농민과 공동정신’ 등으로 한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겠습니다.
 
1930년 3월 6일, 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올라 1931년 중국 상해에 도착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임시정부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게 되어 거사를 결심하고 의거 3일 전인 4월 26일,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며 “나는 적성(赤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거사일인 4월 29일 아침, 백범 선생과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 서로 시계를 바꾸어 갖는 등 여유를 잃지 않았고 오전 11시 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던져 폭발시켜 단상 위의 일본군 수뇌부 거의 전원을 사상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행동은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감격해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고 그리하여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金澤)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서 총살, 25세의 젊디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감동의매헌윤봉길의사평화축제 4

 
계룡도령 일행은 매헌 윤봉길 의사의 삶을 기록한 매헌 윤봉길 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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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 우측에 예덕 상무사 보부상 유물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는데 봇짐장수를 이르는 보상과 등짐장수를 뜻하는 부상을 합하여 보부상이라 한답니다.
 
이날의 주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곳이라 아쉽지만 패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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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으로 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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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과 자유를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겠다"
매헌 윤봉길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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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는 매헌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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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의 유물과 글, 편지가 잘 정리되어 전시되어 있는데 필체가 정말 유려하며 힘이 넘치는 것이 매헌의 기개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합니다.
 
이날 함께한 대한민국 최고의 서예가 노정 윤두식 선생도 글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정말 훌륭한 필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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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강제합방의 원흉 일제의 수뇌부를 척결하는 쾌거를 이루고 사형당하고 유해가 환국 하기까지의 기록,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일대기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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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기념관에는 제15회 충청남도 초. 중. 고 학생 글짓기 대회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수많은 문사 지망생들이 열심히 글을 쓰는 모습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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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옆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어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에도 예비 문사들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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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길 건너 계명문을 지나면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생가 등 매헌사적지가 자리하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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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있고 이날 축제가 한창인 이곳은 여러 가지 체험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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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출가생불환 도시락 만들기는 끝없이 이어진 줄로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루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어 무대의 물품들이 날아다니는 등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하모니카 연주를 하는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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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발로 악보대를 밟고 있는 모습 보이죠? 
이날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 다양한 우리 노래를 연주해 주었는데 갑자기 울컥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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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의거 제84주년 기념식과 제43회 평화축제에 함께하며 느낀 마음은 반민족행위자들을 정리하지 못한 현실에서 앞으로 후손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걱정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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