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대에 귀감이 되는 양세정려문
2016.02.14(일) 13:58:53 | 맛난음식
(
linecplan@naver.com)
어릴때 한 번쯤은 들어 보았던 효자이야기가 있는데요.
아버지가 병환에 걸리자 방언공이라는 사람이 시중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병세가 나아지지 않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피를 수혈했다는 지극한 효심에 대한 이야기이죠. 방언공 양세정려문은 광시면 장신신흥길의 한켠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인 치화공도 아버지인 방언공이 기이한 병환을 앓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리고 극진히 보살폈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나서 "아버지께서 지하로 돌아가시니, 누가 옆에서 모시겠습니까? 지하에서 아버지를 따르겠습니다."하고는 별세하였다고 합니다.
▲ 광시면에 있는 양세정려문
치화공이 세상을 떠날때 아이의 나이가 2살이었는데 부인 신씨는 아들을 바르게 키우는 힘을 썼다고 합니다. 정조대왕이 화성행차를 하면서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죠. 정조가 화성행차 할 때 이들은 이 두 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소연 하였다고 합니다. 아래는 정조가 1783년 5월에 내려준 양세정려문입니다.
牛山金公世孝閭重修上樑文
伏以 感聖化於里美 永慕周制之表閭 循天性於親終 幷蒙旌褒之徽典 塾選少儀之明行 與枯魚至意 筵講大學之衍義 依德懋闡懿 是以 鳳詔揄揚 衿紳讚擧 謹言任城二南 牛山洞天之地靈 鎭鍾厥德.....
▲ 방언공과 치화공의 효심
양세정려문이 어떻게 이곳에 자리하게 되었는지 씌여져 있습니다.
정조대왕은 전교하기를 "김방언과 김치화 부자를 표청하고 정려하는 일은 신녀의 효성에 감동한 소치이다. 해당 고을로 하여금 이 전교의 내용을 신녀에게 타일러 가르쳐 주며, 판부한 내용을 한문과 언문으로 등사하여 길거리에 게시해서 온 도의 선비와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는 자료로 삼게 하라."
부모가 자식에게 효도를 받으려면 가진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요즘 세태와 비교하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