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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계백장군묘 충절을 느낍니다.

국가를 위한 길

2014.06.03(화) 16:46:32 | 맛난음식 (이메일주소:linecplan@naver.com
               	linecpl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계백 말로만 들었지 장군묘를 가본것은 처음입니다. 계백은 신라와의 전투에서 패한다음 660년에 전사했습니다. 소정방과 김유신의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과 백강으로 쳐들어왔는데 의자왕이 계백에게 5,000명의 결사대를 주어 이를 막게 합니다. 신라군이 4번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자 관창을 보내 죽음에 이르게 한 기세로 백제군을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대패했습니다.

계백장군묘

▲ 계백장군묘

 왕릉정도는 아니지만 잘 보존되고 있는것 같습니다. 계백이 결사대를 이끌고 먼저 나아가 3영을 설치하고 신라군을 기다렸으므로 황산벌은 이들의 후방으로 연산면 신양리(新良里) 일대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계백장군의 기세가 느껴지는 묘의 모습입니다. 조선시대 계백은 김유신과 함께 역대 충신으로 기려졌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계백의 황산벌 전투는 백제와 신라의 호국 충정의 격전장이었으며 계백으로서는 1당 100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4번이나 싸워 이겼습니다.

계백장군

▲ 계백장군묘.

저곳에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를 진두지휘했던 계백이 누워있을겁니다.
황산벌 전투로 백제는 비운의 종말을 맞이했으나 우리 역사상에는 충과 호국의 표상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황산벌 대결전장의 하나였던 벌곡면 한삼천리 일대에는 백제군과 신라군이 흘렸던 피와 땀이 냇물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후에 사람들은 한삼천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7월 9일 계백 : 결사대 5천 네 번 회전에 모두 이겼으나 5번째 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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