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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임진왜란 왜군의 식량 보급로를 끊은 금산 이치대첩

권율장군의 대승의 역사가 서려있는 배티재 사당과 격전지를 돌아보며...

2014.03.20(목) 13:22:09 | 김진순 (이메일주소:dhjsdk44@hanmail.net
               	dhjsdk4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대둔산 남쪽 사면의 배티재는 대둔산 산자락의 허리께를 넘는 교통의 요지. 오늘 도민리포터가 기사를 쓰고자 하는 곳입니다.

산골짜기가 길고 깊어 매우 험한 이 재는 임진왜란 때 골짜기에 배나무가 많아 이치(梨峙)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이곳 이치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2만 병력의 왜군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휩쓴 뒤 군량미 확보를 위해 호남평야로의 진출을 목적으로 이 고개를 넘으려 하다가 권율 장군에게 대패한 지역입니다.
 

당시의 전투 역사가 서려있는 이치 고개

▲ 당시의 전투 역사가 서려있는 이치 고개


이치대첩지 비각과 사당 안내문

▲ 이치대첩지 비각과 사당 안내문


사당 앞 이치대첩문

▲ 사당 앞 이치대첩문


이치대첩문의 선명한 태극문양

▲ 이치대첩문의 선명한 태극문양


왜군 2만명이라는 숫자와 맞서 싸운 권율장군 휘하의 병력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고작 1500여명이었습니다.
권율은 동복현감이었던 황진과 함께 작은 규모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재를 지켜 낸 것인데 이 싸움을 일컬어 ‘이치대첩’이라 합니다.
특히 이치대첩이 임진왜란 역사를 조명함에 있어 중요한 이유는 이 전투의 승리가 행주대첩, 진주대첩보다 앞서는 임진왜란 최초의 육상전투 승전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행주대첩과 진주대첩 역시 이치대첩 승리에 큰 영향을 받아서 이뤄졌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여튼간에 비록 수적으로는 왜적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지만 강토를 지키겠다는 충성스런 마음과 그를 따르는 병사, 의병들의 강고한 의지가 결합되어 왜군을 맞아 결사 항전 끝에 승전하여 호남평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치대첩문을 지나 오른쪽에 보이는 '이치대첩비' 비각

▲ 이치대첩문을 지나 오른쪽에 보이는 '이치대첩비' 비각


비각

▲ 비각


안내문

▲ 안내문


다시 세운 비

▲비각 재건립 기적 비


일제강점기에 파괴된것을 다시 세운 대첩비

▲ 일제강점기에 파괴된것을 다시 세운 대첩비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괴한 비몸

▲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괴한 비몸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괴한 비몸 파편의 비문

▲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괴한 비몸 파편의 비문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괴한 비몸 윗부분. 철저하게 파괴되고 깎였음.

▲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파괴한 비몸 윗부분. 철저하게 파괴되고 깎였음.


그렇다면 왜군들은 왜 이 이치 고개를 넘으려 했고, 우리가 지켜낸 호남평야가 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것일까요?
 
우선 현대전이 아닌 당시 전쟁 패턴을 생각해 보면 식량조달을 어떻게 했을지 짐작이 가죠.
현대전은 모든 전쟁 시작전에 장기간 싸울 시간을 계산하고, 거기에 필요한 식량과 탄약을 철저히 계산해서 보급 조달 계획을 짠 다음 전쟁을 시작합니다.
우리 군인들의 훈련 모습을 보노라면 전투식량이란 것을 먹듯이, 인스턴트식이든 혹은 직접 취사를 하든 미리 식량준비를 다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대 전쟁은 그렇지 않고 일정 양만 준비한 뒤 대부분 현지 조달, 즉 약탈의 방법을 썼을 것입니다.
임진왜란도 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적 사료에 의하면 일본 전국시대에도 3일 정도의 식량만 가지고 다니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약탈로 해결했다고 합니다.
당장 많은 식량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기동성을 떨어트리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전에 계획했든, 혹은 어찌어찌 하다가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오래 끌었든 간에 임진왜란은 장장 7년간이나 왜군들이 우리 강토를 유린한 길고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즉 7년이라는 세월동안 왜군들이 점령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게 식량이었는데 그들은 우리 백성들이 지어놓은 농산물을 약탈하는 것만으로는 조달이 안되므로 직접 농사를 짓거나 혹은 우리 백성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한 다음 그것을 뺏기 위해 곡창지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식량 생산에 있어 큰 축을 이루는 세 곳은 바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였는데 충청도와 경상도는 개전 초기에 이미 일본이 점령해버려 많은 농민들이 피난을 떠나고 생산이 중단된 상황에서 왜군들의 입장에서나 조선의 입장에서 최후의 식량 생산 지역은 오로지 전라도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군들에게는 중요한 선택의 문제가 생깁니다.
즉 바다를 통해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느냐, 아니면 육로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바다로 가기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왜군들에게 충무공 이순신장군은 거의 ‘천재지변’ 혹은 ‘재앙’ 수준의 거대한 신적 존재, 공포의 존재였으니까요.
 
결국 그들이 선택한 전라도 지역 공격 방법이 육지전이었는데 점령지였던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기 위한 통로가 바로 '이치'였던 것입니다.

권율장군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충장사

▲ 권율장군 영정이 모셔져 있는 충장사


사당 내부

▲ 사당 내부


이치대첩 전투도

▲ 이치대첩 전투도


권율장군 영정

▲ 권율장군 영정


그러나 왜군은 권율 장군에게 이치에서 완벽하게 패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은 전라도 지역을 왜군으로부터 지켜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왜군들은 식량 조달의 어려움이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조선군의 입장에서는 최후의 식량 보급 기지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고요.
 
아울러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던 이순신의 막강 조선 수군도 육지로 부터의 배후 공격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지요.

현재 사당과 함께 이치대첩비를 품고 있는 비각이 있는 이곳이 당시에 전투가 벌어진 곳인것 같습니다.
 
문에는 이치대첩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치우쳐 비각이 있는데 크고 작은 두 기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가 권율장군이치대첩비(權慄奬軍梨峙大捷碑 문화재자료 제25호)인데 이것은 고종때였던 1866년 금성면 상가리에 당시 도원수 권공이 이치대첩비(梨峙大捷碑)와 대첩사(大捷祠)를 세웠으나 1944년 6월에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하였답니다.
그래서 현재 보시다시피 대첩비가 부서진 상태로 보관돼 있고 대첩을 기록한 문장이 한문으로 씌여 있는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당 정면 위쪽으로 올라가면 다시 문이 있고, 그 문을 지나면 사당인 ‘충장사’가 나옵니다. 권율장군 초상화가 늠름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당을 돌아 나오면서 다시 본 이치. 소중한 우리 강토를 잘 지켜주신 선조들께 감사드리며...

▲ 사당을 돌아 나오면서 다시 본 이치. 소중한 우리 강토를 잘 지켜주신 선조들께 감사드리며...


임진왜란 3대첩인 한산, 행주, 진주대첩에 비해 그 규모는 좀 작은 편이지만 중요성으로 말하자면 아주 의미있고 큰 전기를 마련한 전투였던 것입니다.
오늘 이 후손은, 당시에 이치에서 목숨을 걸고 왜군과 맞서 싸우며 강토를 지켜내신 선조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묵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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