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에 '충남의 대표 호국인물 100인'에 선정된 분
▲ 복지겸 장군 사당인 무공사 입구 도로변
▲ 사당 전경
▲ 고려 개국공신 태사 무공공 복지겸장군 안내문
▲ 복지겸장군 사적비와 업적 안내문
▲ 홍살문. 뒤쪽으로 보이는 것은 첫번째 대문인 창의문
▲ 창의문
▲ 사당으로 들어가는 2번째 대문인 정충문
▲ 복지겸장군 사당인 무공사
▲ 복지겸 장군 영정
태조 원년에 개국 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면천지역의 토지 약 180만평을 하사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세습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고려 왕족과 공신들이 철저한 박해와 홀대가 있었다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복지겸 장군을 비롯한 고려의 16공신이 숭의전(崇義殿, 경기도 연천)에 배향되어 다시금 일부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 창의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보이는 무영사
▲ 창의문을 들어서서 우측으로 보이는 추원재
▲ 무공사 홍보관
복지겸 장군의 이같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과 명예가 그다지 알려지지 못하던 중 당진시를 중심으로 장군을 숭모하고 충청인의 정신문화 회복을 위해 면천지역에 진달래를 심는가 하면 당진의 군화(郡花)를 개나리에서 진달래로 변경하는 노력 등과 함께 장군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답니다.
그후 학술세미나도 열고 진달래 축제와 두견주의 헝보 등 다방면의 노력 끝에 오늘날 복지겸 장군에 대한 의미가 조금 더 크게 부각될수 있었습니다.
복지겸 장군과 면천 두견주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 복지겸 장군의 묘역
▲ 복지겸 장군의 묘
▲ 묘역에거 바라본 무공사 전경
▲ 홍보관 쪽에서 본 무공사
▲ 주차장 옆에 마련된 관리사인 숭모당
장군이 연로하여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었는데, 그의 딸 영랑에게 신선이 나타나서 진달래 꽃으로 두견주를 담그고, 마당에 은행나무 두그루를 심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즉시 영랑은 신선의 말을 따랐고, 100일 후 두견주를 마신 복지겸은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때 심어 놓았다는 은행나무는 현재 당진의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고, 두견주 역시 당진의 전통주로 여전히 그 맥을 잇고 있습니다.
현재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에는 장군의 제단이 있고 신도비와 태사사가 있으며, 해마다 복씨 문중에서 음력 10월1일제향을 올린다고 합니다.
현재 복지겸장군의 사당과 묘역은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어서, 이곳을 찾는 모든이들에게 충직한 호국인물로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역사공원으로서 애국심의 고취와 산 교육장으로 자리매김 되고있습니다.
- 복지겸 유적지(충남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 619번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