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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나라를 빼앗긴 백제 유민의 한이 절절이 담긴 계유명천불비상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발걸음을 뗄수 없었던 국보 제 108호 걸작

2013.08.26(월) 13:03:34 | 커피의 향기 (이메일주소:tjddufqhd33@hanmail.net
               	tjddufqhd33@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340여년전, 서기 673년 4월15일. 지금의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서광암(瑞光庵) 산기슭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빼앗긴 백제 유민들이었다.

 때는 4월이어서 이제 막 나뭇잎과 풀들이 돋아나는 계절.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한적한 산사에서 목탁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들은 모두 숨 죽인채 한 비석 앞에 서 있었다.

비석의 이름은 <계유명천불비상(癸酉銘千佛碑像)>이었다.
 크기가 94cm인 이 비석, 즉 계유년에 만들었는데 비석 앞 면에는 연꽃 위에 자리한 삼존과 수많은 불상이 조각되어 마치 1000개에 달하는 것 같아 천불비(千佛碑)라 불리는 계유명천불비상.
 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합장을 하였다.

 모인 사람들중 서열이 높은 누군가가 축문을 천천히 읽어 내린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서러움에 복받쳐 주체할수 없는 슬픔과 차 오르는 회한, 그리고 분노와 억울함과 달리 어찌할 도리 없는 현실에 대한 비통함이 뒤엉켜 그는 축문을 읽는 내내 울먹이며 떨리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축문을 읽는다.

 “국왕 대신 칠세 부모 법계중생...”
 국왕이라 했고 칠세부모라 했다. 이어서 축문을 듣던 사람들이 목소리 높여 일제히 부르는 한마디
"어라하"
어라하는 당시 백제의 왕을 일컫는 극존칭이다
. 천불비를 앞에 둔 백제 유민들은 “어라하”를 부르며 대성통곡을 한다.

이미 백제는 멸망했고 의자왕이 사로잡히고, 어린 아이부터 부모에 이르는 모든 백제의 유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엄니, 아부지...."
천불비상 앞에서 모든 이들은 울고 또 울었다.


 이상은 도민리포터가 계유명천불비상을 설명하기 위해 쓴 허구의 가상 시나리오입니다.

 공주 국립박물관에 가시면 국보 제 108호 계유명천불비상을 만나 볼수 있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있는 계유명천불비상

▲ 국립공주박물관에 있는 계유명천불비상


이 불상은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서광암(瑞光庵)에서 발견된 작품으로, 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과 글을 새겨 놓은 것입니다.

 이 국보에는 “계유(癸酉, 673)년 4월 15일에 백제유민 250명이 국왕대신, 칠세부모, 법계중생(國王大臣 七歲父母 法界衆生)을 위하여 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왼쪽 협시보살 옆에 새겨진 불상의 명문

▲ 왼쪽 협시보살 옆에 새겨진 불상의 명문

 여기서 말하는 “칠세부모”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우선 긍금합니다.

 박물관의 학예사 선생님께 물어 보니 7세대 즉 본인을 기준으로 위의 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와 다시 본인의 아래인 아들 손주 증손주까지를 포함하는 불교 용어라 합니다.

 그렇다면 국왕 대신을 비롯해 과거 일반 백성부터 앞으로 태어나 살아갈 후손들까지를 모두 망라한 호칭이었다 할수 있습니다.

 이 불상이 만들어진 시기와 내용을 미루어 볼때 도민리포터가 각색한 시나리오의 내용이 맞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계유명천불비상의 머리 부분. 수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 계유명천불비상의 머리 부분. 수많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이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억누르며 사로잡혀 끌려간 왕과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나머지 유민들의 무산안위를 빌며 이 불상을 건립했고, 불상 완성을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하는 서광암에서 축문을 읽으며 다같이 회한을 달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계유명천불비상은 지붕모양을 한 덮개돌과 연꽃무늬받침, 몸체를 각각 따로 만든 비석모양입니다. 양면에 작은 불상들이 수없이 새겨져 있고, 불비상의 아래쪽에 있는 삼존불의 좌우에 기록문이 전해집니다.

계유명천불비상의 중앙 비몸 부분. 마찬가지로 천불을 조각하려 했던 듯...

▲ 계유명천불비상의 중앙 비몸 부분. 마찬가지로 천불을 조각하려 했던 듯...
 

계유명천불비상의 하단 삼존불. 중앙 본존불을 배경으로 양쪽에 협시보살이 있습니다.

▲ 계유명천불비상의 하단 삼존불. 중앙 본존불을 배경으로 양쪽에 협시보살이 있습니다.


 삼존불은 연꽃무늬가 새겨진 반원형의 기단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4각형의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 옆에 협시보살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본존불은 옷을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상체가 많이 닳아서 세부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연꽃을 두르고 있는 본존불

▲ 연꽃을 두르고 있는 본존불
 

왼쪽 협시보살

▲ 왼쪽 협시보살
 

오른쪽 협시보살

▲ 오른쪽 협시보살


특징적인 것은 불상이 입고 있는 옷이 무릎 아래로 길게 흘러 내려와 대좌까지 덮고 있다는 점입니다. 양 옆의 협시보살도 손상이 많아 세부 모습을 살피기는 어렵지만, 무릎 부분에서 옷자락이 X자형으로 교차되고 있어 삼국시대 보살상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삼존불상 외에도 사각형의 돌 전체에 일정한 크기의 작은 불상들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깨진 부분에 있었을 불상들까지 감안한다면 천불(千佛)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왼쪽 측면에서 본 계유명천불비상

▲ 왼쪽 측면에서 본 계유명천불비상. 그때의 백제유민들의 흐느낌이 들리는듯 하여 한동안 자리를 뜰수가 없었습니다.


이 작품은 삼존불 좌우에 새겨져 있는 글을 통해 볼 때 신라 문무왕 13년( 673)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유민들이 망국의 한과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작품이란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아주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공주 박물관에 가시거든 이 국보제 108호 계유명천불비상을 꼭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수많은 백제 유민들이 나라 잃은 설움을 억누르며 불상 앞에서 모든이들의 안위를 비는 의식을 거행하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듯 합니다.

 이 불상 앞에서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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