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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성스런운 땅 신리성지를 밟다

선조의 신앙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곳

2013.08.23(금) 16:35:23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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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더위가 최고조에 이르는 계절에 신리성지(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 151번지)로 가는 길에는 벼가 한창 자라는 푸른 들판과 하얀 뭉게구름 이는 하늘이 있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마치 더위가 기습하여 턱이 숨에 닿을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는데요. 차 창문 밖의 풍경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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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울 성지에서 7.5km 자동차로 합덕 방향으로 달리다가 보면 신리성지 돌 팻말이 나오더군요. 신리성지는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로서 프랑스인 성 다블로 안또니오 주교님가 거처하며 21년간 사목 활동을 했고 한글 교리서를 만들어 당시 상황을 로마 교황청에 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주교 박해때 순교하시고 104위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신리성지 앞까지 물이 들어 왔기 때문에 외국 선교사들이 배 타고  이 곳에 들어와 정착하며 만인은 천주앞에 하나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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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던 날에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 기념관을 짓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생전 교회 사목활동 기록의 흔적과 유품들을 보관하고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자 함이라고 하는데요. 2013년 올해부터 건물을 짓기 시작하며 2014년 5월 6일 11시 미사에서 축성식이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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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리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경작하던 농토가 그 지명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합니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가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있어 역사적 보존 가치가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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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예수의 동상이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성다블뤼, 손자선 기념 성당 외부 정경은 현대식 건축 양식으로 지으졌으며 2006년 5월에 축성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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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리성지에서 합덕 쪽으로 가다가 궁리 보건진료소에서 300m 올라가면 무명순교자들의 묘지가 나온다고 합니다.
손자선 성인은 순교후에 신리의 선산에 묻혔으며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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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성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로 성다블뤼 주교의 주교관이며, 조선 제5대 교구청이기도 합니다.이곳에 안 주교님이 머물며 선교활동을 하고, 조선 순교사 비망기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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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주교님께서 사목활동 하실 때 입었던 옷과 유품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상복을 입고 돌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면 포졸들이 검문을 잘 안 하므로안전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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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기억으로는 긴 손잡이가 달린 인두를 숯불이 담긴 화롯불에 묻어 놓고 달구어 가며 삼베나 무명천의 구김살을 눌러서 펼때 사용한것으로 기억합니다. 인두 끝의 아랫면은 평평하고 끝이 뾰족하여 옷의 솔기나 구석진 좁은 곳까지 다릴 수가 있었습니다. 인두를 숯불속에 찔러서 달구면 한참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후에 숯불을 담아 다리는 숯불 다리미 그리고 전기다리미가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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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목으로 만들어진 이불 호청이나 의복등을 물풀을 먹인 후에 정성스럽게 여러겹으로 접은 다음에 다듬이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두드려서 천을 부드럽게 만들때 사용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의복도 정성을 들여 단정하게 입고 생활하며 선비 정신을 가다듬으며 생활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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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님이 생활했던 방에는 등잔불이나 촛불을  키고 성서 책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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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며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이 있으며 특히 천장에는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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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성 생가, 주교관는 옛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부엌의 모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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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4세기경에 우리나라에 놋쇠가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놋쇠그릇을 사용하게 되었고 이후에 스텐그릇이 나오며 놋쇠는 일 년에 몇 번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낼 때 사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농촌 아낙들은 이 놋쇠그릇을 꺼내어 짚으로 모래를 묻혀가며 닦던 1970년대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네요. 놋쇠 수저를 독극물이 있는 음식에 담그면 색깔이 녹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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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아궁이 앞에 있는 이것은 풍로라고 하는데 뒷바퀴에 고무줄을 감아서 손잡이를 돌리면 앞부분으로 바람이 나와서 숯불을 담은 요리 화로에 불이 잘 타게 합니다. 여름날 고 할머니께서 위 풍로를 돌려가며 바람을 일으키고 숯불이 활활 타오도록 하여 된장찌개도 끓이고 장날에 사온 갈치를 죽순 잎사귀를 깔아서 생선을 맛나게 구워주던 어린 시절 추억이 그립습니다. 옛 선조들이 사용하던 생활 도구는 그대로인데 옛사람은 온데간데 없음을 보니 인생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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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을 저장하던 옛날 그릇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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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식을 말릴 때 사용하던 짚으로 만든 멍석도 있고 대나무 바구니와 잡티를 걸러내는 얼그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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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관 뒤편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는 오지항아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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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푹찌는 무더위에도 피어나는 여름 꽃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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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10월 ‘파리 외방전교회’ 성당에서는 다시 ‘천기’라 불린 오르간이 울립니다. 어느 젊은 사제의 경건한 서원이 신령스런 멜로디에 실리어 하늘로 오릅니다. 치명을 다짐하며 ‘전교회’에 입회한 그 날의 주인공은 성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였습니다. 그의 마음을 천상까지 인도한 멜로디의 주인공은 구노(Gounod, 오르간주자)이구요. 스물다섯 살 동갑내기 음악가와 조선선교사, 그들의 재능과 열정이 어울려 또 하나의 천상 음성을 자아냈다고 합니다.

1844년 2월 ‘전교회’를 떠나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너 코리아라는 작은 나라로 전교의 사명을 띠고 떠난 다블뤼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21년을 조선의 선교사로 살다가 치명하기까지 단 한 번의 오르간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구노가 연주해 준 마지막 성가의 추억들만이 선교사의 가슴에 각인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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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이국땅 낯선 초가집에서 신앙의 열정을 불태우다가 한떨기 생명의 꽃으로 떨군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의 동상만이 드높은 하늘 아래에 서 있습니다. 국적을 넘어 베푼 그의 희생과 사랑이 오늘날 그리스도 천주교회 발전사의 한 면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충청도는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여 더 넓은 평야와 더불어 풍요로운 곡식을 생산하였고 학문을 하던 선비들이 모여 살던 평화로운 동네였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서양문화를 받아 드린 선구자 역할을 한 곳이라는 사실을 이번 성지순례에서 깨달았습니다.

사대주의 유교사상에 젖어 있던 당시 상황에서 "천주앞에 인간은 평등하다"는 천주교 교리로  조선시대의 양반과 하인의 신분차별을 타파하는 엄청난 삶의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에 비록 천주교 박해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순교하고 고난을 겪었지만 오늘날 자유와 평등이라는 삶의 자유를 누릴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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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열기가 후끈한 신리 성지에는 백일홍이 열정을 가득 담은 채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신리성지에는 외국선교사들의 넋이 살아 있으며 꽃다운 나이에 사제서품을 받고 먼 타국까지 배 타고 와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신앙을 증거하다 돌아가신 그분들의 영령이 머무는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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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한점 없는 더운 여름에 차 창문을 열면 숨이 막힐 듯 한낮의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신리성지 기념관을 짓는 사람이 보입니다. 누군가 치른 고귀한 희생이 세계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후세에 빛나는 정신이 됨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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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5월 신리성지 기념비가 완성되어 축성하는 날에는 꼭 방문하고 싶은 소망을 담으며 아름다운 신리성지로 탄생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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