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사는이야기

여사울 성지를 찾아서..

2013.08.19(월) 10:16:19 | 도희 (이메일주소:ass1379@hanmail.net
               	ass1379@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1



한여름 더위를 잠시 잊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36-10에 있는 여사울 성지를 찾았습니다. 내가 사는 이 고장이 신앙 안에서 공동체적인 충실한 삶을 살아간 선조들이 살았던 곳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천주교 박해라는 수난의 역사 현장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며 그들의 순교정신과 자기희생을 보게 되었고 물질적이고 이기주의로 팽배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지 순례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내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2



이곳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어있으며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꼬(1752-1801년)가 생전에 살았던 곳으로 천주교의 못자리가 된 곳입니다.
이존창 루도비꼬는 25세에 서울에서 권일신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동네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품과 덕망을 존경하던 이웃 사람들도 그를 본받아 세례를 받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3

 

우리가 방문한 시간에 성당은 고요한 침묵만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예산을 일컬어 말하기를, 산천은 평평하고 아름다우며 한양의 남쪽에 위치하여 한양의 세력 있는 집안치고 여기에 농토와 집을 두고 거처로 삼지 않는 사람이 없다."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여깁니다. 내포란, 충남 아산에서 태안까지의 평야 지대를 말하며 삽교천과 무한천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의 중서부 지역을 일컫습니다.

내포평야는 삼교천 제방이 생기기전에는 토지가 비옥하고 넓고 물고기,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았기 때문에 충청지방의 경제적 중심지였다고 전해집니다. 如서울(여기도 서울)이 여사울로 지명이 바뀌었고 오늘날의 여사울에서는 화려했던 옛날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주민의 대부분이 캐톨릭 신자입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4


한여름 오후에 방문한 여사울 성당은 오색 유리창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으로 잠시 세상의 복잡함을 벗어나 지나는 길손도 잠시 들려 명상과 기도에 들어갈 수 있는 아늑하고 조용한 곳입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5

우리가 방문한 날에는 성당 벽면 뒤에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 담긴 빛바랜 옛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6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사진은 애틋하게 자식들을 바라보며  두 아이를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우리 옛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7

 

성당밖에 있는 십자가 아래에는 야외미사를 올릴 수 있는 돌제대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캐톨릭 교회는 처음에는 천주교를 학문으로 받아 들였지만 차츰 신앙으로 발전 하였습니다. 1791년 모친상을 입은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이 북경 선교사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워 4당에 묻은 사건이 빌미가 되어 신해 박해 사건이 터졌고 그 이후에 천주교 탄압은 계속 되었습니다.

윤지충이 최초 순교로 천주교인들은 사대박해 즉,신유,기해, 병오, 병인박해를 겪으며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끝에 죽음을 맞으면서도 자기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무려 1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8



성지 우측을 돌아가면 십자가의 길을 묵상할 수 있는 산책로가 있는데, 자연경관이 수련한 이 길을 따라가며 십자가에 대한 명상에 잠길 수가 있습니다.
제가 사는 계촌리 일대에도 1972년 새마을 도로를 만드는 중에 성물 43점이 무더기로 발굴되어 이 유물들을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마을에도 신부가 3명이 탄생했고 지금도 공소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예산읍내까지 전대 미사를 보러 어른 아이들이 먼 곳으로 걸어 다녔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9


예수그리스도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14처 길을 따라 걷어 가는데 울창한 나무 사이로 계절마다 색다른 꽃이 피어나는 곳으로 여름꽃 한무리가 피고지고 더러는 씨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천주교를 우리나라에 전한 것은 서양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천주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같은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가르침은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 차별이 있던 우리나라 유교 사회에서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10


고개 숙인 소나무 아래에 있는 십자가의 비석앞에서  "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의 언덕에 오른  2,000년 전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바다를 건너 한국에 건너와 정착하며 선조들이 그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겪은 고난의 역사 현장과 생가터를 방문하는 일은 참 의미로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11

 

십자가의 길을 돌아 산책로가 걸어 나오면 큰 소나무가 있는 쉼터 옆에는 신앙의 선조 이존창 로두비꼬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존창 루도비꼬는 신유와 신해 박해의 고통을 받고 끝내 1795년 말에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43세 일기로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되었다고 전해집니다. 1983년 대전교구가 이 땅을 사들이고 성지로 가꾸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십자고상, 묵주패, 성해통의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여사울성지를찾아서 12



여사울을 한국천주교회의 못자리라함은 이존창의 활발한 전교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가 이존창의 조카딸이고 최양업 신부가 이존창의 생질의 손자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여사울동네는 추사 김정희 생가와 인접한 마을입니다.
당대에 이웃마을에 살았던 이존창이 옆동네에 사는 글 잘 짓고 학문 잘하고 그림 잘 그리는 실학파 추사 김정희에게 천주교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당시 천주교를 수용한 학자들의 대부분이 낡은 문화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인 실학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지리적으로 보면 추사가 고향에서 한양으로 가려면 여사울을 반드시 거쳐야 했고 지금은 삽교천 제방이 생겨 바다가 저만치 밀려났지만 조선 시대의 여사울은 뱃길이 닿는 포구가 가까이 있어 여사울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건넜다고 전해집니다.

내가 귀촌하여 삶의 터전을 잡은 이 고장이 선비의 고장이며 성스러운 사람들이 태어난 고장이라는 사실에 가슴 뿌듯하며 앞으로 그분들의 흔적을 찾아보고자합니다.

 

도희님의 다른 기사 보기

[도희님의 SNS]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