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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의 유허지(遺墟址)가 천안 병천에 있다

2013.03.26(화) 18:47:35 | 이석구 (이메일주소:hsklske239@naver.com
               	hsklske239@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시민장군의유허지가천안병천에있다 1

 


 

김시민장군의유허지가천안병천에있다 2

 



충남 천안 병천 가전리에 임진왜란 3대첩(壬辰倭亂 三大捷)의 하나인 진주대첩(晋州大捷)에서 대승을 거둔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생가지가 있다.

김시민장군(1554-1592)은 본관이 안동으로 부친은 지평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며 고려 명장 김방경장군(金方慶)의 12대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기개가 높으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마을의 연못에서 이무기가 자주 나타나 동네 사람들이 놀라 괴로움을 당하자 공은 손수 만든 활을 가지고 거북바위에 올라가서 이무기를 쏘아 죽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밑에 거북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사사처(射蛇處)라 불리고 있다.

전해 오는 일화는 공이 병정놀이를 하며 대장이 되어 지휘하고 있는데 고을 수령의 행차가 있어서 길을 비키라 하자 공이 누가 감히 대장이 지휘하는 진중을 지나가려 하느냐 호통을 쳐서 원님이 말에서 내려 장차 큰 재목감이라고 칭찬하였다 한다.

공은 25세 때 무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판관. 진주목사가 되어 민심 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여 무기를 정비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하였다

왜군은 남도 공략의 요충지인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우군은 불과 3천 8백명의 적은 병력이지만 김시민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결사항전의 용맹한 애국정신으로 일치단결하여 적장 하세가와가 이끄는 적군 2만명과 수일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적군 2만명을 거의 전멸시켰다. 의병장 곽재우장군의 협공도 큰 역할을 하였다.

대승을 거두었으나 김시민장군은 적탄을 맞고 나라를 걱정하며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운명하였다

시호는 忠武公, 宣武公臣추록, 領議政 추증, 上洛君 추봉 경남 진주 창렬사에 배향, 충북 괴산 충민사에 사당과 묘소

出處 : 두산백과, 국사백과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시민장군 유허비

충무공 김시민장군의 유허지에는 생가터와 사사처가 남아 있고 유허비가 서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오직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한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순국정신을 길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김시민장군의 유허지를 찾아 오는 길은 천안역과 버스터미널에서 목천 독립기념관 방향으로 6km쯤 가면 독립기념관 교차로가 나온다. 병천 방향으로 직진하여 2km쯤 더 가면 병천 가전리 교차로가 나온다.

가전리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1km쯤 가면 가전리 시냇둑이 나오고 고속도로가 보인다. 냇둑을 타고 좌회전하여 200m쯤 가면 마을 입구에 유허비가 나온다.

이 지역은 애국충절의 고장이라 탐방을 마치고 2km쯤 동쪽으로 더 가면 병천 시장이 있고 유관순 사우와 근처에 생가지가 있다. 목천에는 상해 임시정부 주석 독립운동가 이동녕선생의 기념관과 생가지가 있다. 두루 한 바퀴 돌아보면 애국애족의 인식이 새로워 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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