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여행

충남의 긍지·항일(抗日)의 성지 홍성

자랑스러운 충청인의 숨결이 살아 숨쉽니다.

2012.08.26(일) 12:03:26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자랑스런 충청인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충남의 긍지,

항일(抗日) 독립운동의 성지 홍성

 

일본제국주의의 침탈로 국권이 유린된 지난 세월, 우리나라의 중앙인 충청남도에는 유난히 독립투사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를 기호유학과 선비정신에서 찾아 볼 수있는데 홍주라는 지명으로 항일의 역사에 길이 남은 홍성을 다녀왔습니다.

 

홍성에는 여러 동학과 항일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역사를 돌아 보면 홍성군은 옛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한 군으로 그 중심인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로 995년에 도단련사를 두었고, 1012년 지주사로 고쳤다가 홍주로 고쳤으며 결성은 본래 백제의 결기현인데 신라 때 결성으로 고쳐 서림군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인 1018년 운주에 이속되었다가 1172년에 감무를 두었던 곳이며 우왕 때 왜구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에 진성을 둠으로해서 유민들이 다시 정착했으며 조선시대인 1413년 현감을 두었다가 1895년 군으로 승격하였고, 1914년 홍주군·결성군 및 보령군의 일부를 통합하여 홍성군이 되었다고합니다

 

홍성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홍주성의 동문으로 고종 7년(1870)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門樓)인 조양문(朝陽門)을 만나게 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문액(門額)을 하사한 것으로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경의문(景義門)이라 부르던 서문과 망화문(望華門)이라 부르던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으로 남은 것을 1975년 해체복원하여 문루의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에는 수백명의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되었다고도 합니다. 

 

홍주읍성의 동문이었던 조양문(朝陽門)

▲홍주읍성의 동문이었던 조양문(朝陽門)

 

조양문(朝陽門)을 지나면 나타나는 것이 조선시대 홍주군의 동헌(東軒)입니다.

 

동헌의 정문인 홍주아문(洪州衙門)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홍주아문(洪州衙門)’ 현판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고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녀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있습니다.

 

옛 홍주군 동헌의 정문이었던 홍주아문(洪州衙門)

▲옛 홍주군 동헌의 정문이었던 홍주아문(洪州衙門)

 

홍주군의 동헌은 조선말 동학 농민전쟁 전투지이자 천주교 순교지, 항일 홍주의병의 중심지로 내포지방 선비의 기개와 민초들의 아픔이 숨 쉬고 있는 역사의 현장인 홍주산성내에 위치해 있습니다. 현재 홍성군청의 정문으로 사용되는 홍주아문(洪州衙門)을 들어서면 현재의 군청사 곁에 1678년(숙종 4)에 홍주군의 정사당(政事堂)으로 건립된 안회당(安懷堂)이 있는데 홍주목사와 홍주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는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곳입니다. 

1870년(고종 7)년에 동헌을 개축하고 논어(論語)의 ‘노자안지(老者安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들과 젊은 사람 모두를 위해 정사를 펼치겠다는 의미를 담아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안회당(安懷堂)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받았습니다. 그러나 현판은 광복 이후 분실되어 1991년에 안회당을 부분 중수하면서 현판과 당기(堂記)를 새로 조각하였다고 합니다. 

 

옛 홍주군 동헌의 정사를 보던 안회당(安懷堂)

▲옛 홍주군 동헌의 정사를 보던 안회당(安懷堂)

 

안회당(安懷堂)의 뒤뜰에는 1896년(고종 33)에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가 건립한 여하정이라는 정각이 사각의 못 위에 떠 있는 수상정(水上亭)이 있는데 필서가(筆書家) 김병수(金炳秀)가 쓴 여하정(余何亭)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언제 복원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 부분에서 제대로 된 복원인가하는 의문을 갖게하는데 관계자들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는 듯하여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안회당(安懷堂)의 뒤뜰에 자리한 연못과 수상정 여하정(余何亭)

▲안회당(安懷堂)의 뒤뜰에 자리한 연못과 수상정 여하정(余何亭)
 

홍구의 동헌인 안회당과 여하정을 품고 있는 홍주읍성(洪州邑城)은 사적 제231호로 지정된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성으로 홍주성으로 불리다 홍주읍성으로 명칭이 변경된 곳으로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성은 조선 문종 1년(1451년)에 수축하였으며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쌓은 홍주읍성의 치성(雉城)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쌓은 홍주읍성의 치성(雉城)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는데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적대(敵臺) 24대 가운데 6대만 쌓았고,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女?.敵臺)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는데 사철 마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홍주읍성의 성벽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는 홍주읍성의 성벽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것으로 유명한데 이 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이 성은 1906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반대하여 민종식(閔宗植) ·이세영(李世永) 등이 일으킨 의병부대가 이곳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퇴시킨 사적지로도 유명합니다.
 

홍주의 의병들은 홍주문화권내에서의 항일의병을 지칭하는 것으로 홍주문화권의 범위는 충청남도의 서부지역(1895년의 홍주부 관할 22개군)일대를 중심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기호학파 성리학의 정통을 잇는 남당 한원진(南塘 韓元震)을 종장(宗丈)으로 섬기며 주자학적 성향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지역은 홍주문화권 또는 내포문화권이라 하며 갑오변란과 을미사변,변복령과 단발령(變服令 斷髮令)의 공포 그리고 을사5조약의 체결 등을 기화로 봉기하였습니다.

홍주의병의 사상적 기반은 조선후기 기호학파의 양분을 초래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을 일으킨 한원진(호;남당,1682-1751)의 호론, 주자학의 의리론과 이단론에 입각한 척사론에서 찾을 수 있는데 호론은 유교와 불교,사람과 사물 그리고 중화와 이적의 구별을 엄격하게 하는 이단론으로 발전, 홍주일대의 유생들에게 전수되어 척사론의 주자인 김복한, 이설, 김상덕, 임승주, 임한주 등의 영향을 받아 생사를 초월한 의병을 일으키는 주요 이념적 기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척사론은 홍주일대에 팽배하였는데 이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기화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독일상인이 오페르트는 1866년 2차에 걸쳐 해미현에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로 돌아가자 1868년 홍주군 행담도에 정박하고 구만포에 상륙하여 덕산의 가야산에 있는 남연군 묘의 도굴을 시도하다 덕산군민의 항의와 묘광의 견고함으로 포기하고 달아나는 등 서해안에 이양선의 잦은 출몰은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게 되고 척사분위기를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1871년 홍주군 구항면에 척화비를 설치하기 이르고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보령의 유생 황재현과 1880년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체포된 백낙관이 1883년 처형당하자 이 지역인들은 그를 백충신이라 하여 추앙하는 등 의병투쟁의 씨앗이 자라게 됩니다.

 

첫 항일 의병의 봉기는 1894년 6월 일본군이 갑오변란을 일으키고, 내각이 일본인에 의해 개편됨으로 조선정부는 이른바 반식민지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1894년 12월과,1895년 5월의 의복제도를 변경한 이른바 변복령의 실시로 검은 색의 周衣(두루마기)를 입도록 강요하자 이를 전통문화의 근본적인 파괴정책으로 인식하고 안창식(安昌植)·박창노(朴昌魯)등의 의병투쟁을 위한 모병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1895년 10월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을미사변의 발발은 이 지역 유생과 민중세력을 더욱 분개토록해 김복한을 총수로 하는 반개화 반침략의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됩니다.

 

또한, 을사조약의 체결 역시 홍주의병의 주요 봉기원인이 되는데 일제가 러일전쟁 승리 후 러시아와의 잠정적인 합의하에 한국의 병합을 위한 정책을 펴나갔으며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준식민지상태에 빠지고 주권은 일제에 의해 박탈당하고 민종식(閔宗植)을 총수로 하는 제2차 홍주의진이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1895-6년과 1906-7년의 2차에 걸쳐 전개된 홍주의병은 조선말 전국적인 항일의병투쟁을 선도해 간 대규모 무장투쟁이며, 통문과 격문을 발표함은 물론 각국 공사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국제적으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독립전쟁이었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홍주의병의 투쟁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어 이세영, 이용규, 김복한, 안병찬, 김덕진, 전양진, 임한주 등의 항일투쟁이 이어졌으며, 타 지역의 의병봉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며 1910년대 독립전쟁과 나아가 3.1운동으로까지 인적·사상적으로 계승되는 등 사실상 항일 의병의 시작점이라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홍주읍성내에 위치한 '홍주성역사관'에서 찾아 볼 수있는데 자라나는 어린이들이나 청소년 그리고 충청의 향민들에게 충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훌륭한 역사적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홍주성역사관

▲홍주성역사관

 

홍주읍성은 지금 복원이 진행되고 있는데 꾸미기식 복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정확한 역사적 고증보다는 공원형태의 즐기는 공간으로 만들어지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홍주읍성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석재 유물들은 방치해둔 채 모두 새롭게 제적 설치되는 모습을 보고 든 느낌입니다.

 

홍주읍성 내에 설치되고 있는 정자의 모습

▲홍주읍성 내에 설치되고 있는 정자의 모습

 

조금 늦어지더라도,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정확한 고증을 통해 제대로 된 복원이 이루어지길 희망합니다.

 

지금 '제8회 홍성내포문화축제' 개최를 앞두고 완공을 서두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한번 잘못 복원해 버리면 이를 수정하기 어렵거나 아예 제대로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서울 청계천 공사에서 볼 수 있듯이 속도에 매달리는 지자체의 성과주의 토건문화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제8회 홍성내포문화축제 포스터

▲제8회 홍성내포문화축제 포스터

 

유난히 친일행위자가 많이 배출된 지역과는 달리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충청의 선비문화 그리고 의기와 항일정신에서 비롯된 수많은 독립투사들의 정신을 이어 받은, 보다 높은 자긍심으로 내 고장 충청남도를 더욱 더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자손대대로 이어가며 고취해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자랑스러운 충청남도, 그 속에 항일의 성지 홍성이 있습니다.

 

 

 

계룡도령춘월님의 다른 기사 보기

[계룡도령춘월님의 SNS]
  •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mhdcom
  • 트위터 : http://twitter.com/aspire2k
  • 미투 : http://me2day.net/mhdc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