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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충청도의 유래-충남역사박물관 둘러보기(1)

2012.01.31(화) | 사람사는세상 (이메일주소:leehappyday@hanmail.net
               	leehappyday@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얼마 전 공주에 있는 충남역사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본래 박물관이나 과학관 등 전시관을 좋아하던터라 출발 전부터 기대가 만발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먼저 충청의 유래부터 알아보고자 합니다. 

'충청'이라는 이름은 고려 후기에 처음 등장합니다. 고려의 행정구역은 수도가 개경에 있었던 탓에 조선과는 다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고려시대에 충청과 경기 일대의 지역을 양주와 광주의 머리글자를 딴 양광도 또는 양광충청도라고 불렀습니다.

양광도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까지 사용되다가 한양 천도로 인해 팔도의 경계도 변하게 되어 양주와 광주가 경기도로 편입되면서 지금의 충청도(충주+청주)가 출범하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지역에서 역모 등의 중요 국사범이 나타나면 해당 지역을 인근 군현에 통폐합시켜버리거나 관청 규모를 격하시키는 조치를 내렸습니다.(반대로 충신이나 효자 등이 날 땐 격상시켰습니다)

역모자의 집은 헐고 그 일대에 못을 파서 아예 흔적을 없애버렸는데 이를 저택(瀦宅)이라고 합니다. 이 경우 대표 도시의 앞글자를 차용하는 도 명칭도 변할 수 밖에 없는데요.

충청도는 어땠을까요? 

<12번이나 바뀐 '충청도' 명칭>

연산군 때 청주 대신 공주가 들어가 충공도(충주+공주)가 됐다가, 중종 때는  충주가 빠지는 대신 청주가 다시 들어와 청공도(청주+공주)로 변경됐고, 명종 때는 다시 공주가 빠지고 홍주(지금의 홍성)가 대신하면서 청홍도(청주+홍주)가 됐습니다. 

또 광해군 때는 공청도, 인조 때는 홍충도 등등으로 계속 바뀌다가, 급기야 효종 때는 대표 도시인 충주와 청주가 모두 빠지는 공홍도(공주+홍주)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에만 '충청도'의 이름이 12번이 바뀌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중 전국 팔도에서 최다 기록입니다. 그렇다면 충청도에서 다른 지역보다 유독 많은 민란이나 역모가 일어났던 것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경상도나 전라도, 평안도나 함경도는 변방에 위치했다는 중요성과 왜나 중국과의 외교 등을 이유로 쉽게 도 명칭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충청도가 유독 돋보이게(?) 된 것입니다. 

반대로 충청도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이나 일제 강점기 등 국가적 위기에서 나라를 살리는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진짜 충절의 고장 충청도>

임진왜란 동안 조선군의 실제 가용 병력 중 상당수가 충청도에서 나왔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이 학설에 따르면 경상도 병력은 개전 초기에 이미 와해되면서 일부 의병을 제외하고 전쟁 기간 내내 이렇다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전라도 역시 개전 초 전라관찰사 이광이 전라도 징집군 5만 명이 주축이 된 근왕군을 이끌고 북상하다 용인에서 참패하면서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는 산산히 흩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전쟁 기간 내내 그마나 온전히 유지된 충청도 병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됐다고 합니다.

또 충청지역에서는 금산의 조헌과 승병 영규 등 격렬한 의병 활동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 투쟁사를 볼 때도 충청권의 빈도수나 강도면에서 가장 활발했습니다.

충청은 곧 충절의 고향인 것입니다. 갈수록 장황해지는 이야기를 이만 접고 다음 글에서 충남역사박물관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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