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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국내 최초 사학' 파평윤씨 노종파 종학원

충청도 제일의 명문 가문을 찾아서 [3]

2010.02.19(금) | 계룡도령춘월 (이메일주소:mhdc@tistory.com
               	mhdc@tistory.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부산을 떠나 이곳 충남 공주의 계룡산에 터를 잡은지도 벌써 10년. 그동안 주변의 이곳 저곳 참 많은 곳을 다녔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해 올바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 하나 공부를 해 보기로 하고 그것을 정리하여 윤증선생과 노서지역의 대표적 사족인 파평윤문 노종파에 대해 "명재, 300년을 뛰어넘은 '시대의 표상'(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37632)",  "호서지방 대표 사족으로 '명성 자자'(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37941)"라는 기사를 올린 적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서 누구에게 수학 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윤증의 집안은 당대 최고의 학문집안이었다.
그의 집안이 당대의 학문가였음을 말해 주는 유적은 현재도 논산시 노성면에 남아 있다.
종학당(宗學堂)이 바로 그곳이다.
종학당은 글자 그대로 일가(宗) 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學) 집(堂)으로 인조 후반기에 윤증의 큰아버지인 윤순거(尹舜擧)가 세운 일종의 집안 학교이다.

일반 서원이나 서당과는 다르게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을 두고 학칙도 정하여 시행하였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 아래 병사저수지가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는 이곳 종학당에서 윤문 노종파 일가의 자제들이 숙식을 함께 하며 학문 높은 집안 어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찾아 간 곳이 바로 종학당이다. 

  국내최초사학파평윤씨노종파종학원 1  

종학당의 입구는 당시 교문으로 사용되었을 법한 홍살문이 위용을 과시하며 서 있고, 홍전문(紅箭門)·홍문(紅門)이라고도 불린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지붕 없이 붉은 살을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 박은 능(陵)·원(園)·묘(廟)·궁전·관아 등의 정면 입로(入路)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인 홍살문을 지나면 종학당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입구에서 조금만 들어 가면 종학당에 대한 안내문과 구 소련의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가 2008년 방문하여 남긴 글을 석문으로 남겨두고 있기도 하다. 

  국내최초사학파평윤씨노종파종학원 2  

좌로는 보인당[輔仁堂]이 있는데 이곳에서 중인들까지 교육을 했다고 하니 주변 사람들까지 포용하던 파평윤씨 집안의 학문 창달에의 깊은 뜻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가운데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로 이용하였던 곳인 정수루[淨水樓]가 서재인 백록당[白鹿堂]과 누각이 연결되어 있다.

정수루에서 내려다보면 연못과 종학당, 병사리 저수지의 물빛과 건너 마을의 파평윤문의 재실이 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정수루를 올려다 보며 오른쪽, 검소하면서 아늑한 곳에 자리잡아 후학들을 가르치던 종학당이 있다. 학문의 수준이 높아지면 종학당을 떠나 백록당에서 수학 했다고 하는데 교육방법이 아주 체계적이고 철저했던 모양이다.

종학당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파평윤씨의 문중서당이다.
그 창립 연대는 최근 숭정 원년의 상량문이 발견되어 1628년경 童土 尹舜擧(1956-1688)가 건립한 것으로 확인이 되고 있다.
16세기 중반 니산에 터를 잡은 파평윤씨 노종파가 불과 2-3세대 만에 일약 조선의 명문가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바로 종학당의 문중교육에 힘입은 바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종파의 기틀을 마련한 최고의 수훈자는 동토 윤순거로 윤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백부인 윤수[尹燧]에게 입계한 그는 4촌 서 윤원거[尹元擧]와 아우 노서 윤선거[尹宣擧]와 같이 종약 및 가훈을 제정하고 종학을 창설하였으며, 초대 당장이 되어 책,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는 등 초창기학사운영의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윤순거는 이와 함께 재실(병사)와 의창, 정수루 등의 창건에 전력하여 완공하였지만, 건립당시 그가 관직에 있었으므로 감역은 아우인 윤후거[尹後擧]에게 전적으로 맡겨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종학당의 교육이념과 체계는 1645년에 만들어진 파평윤씨 노종파 종약[宗約]과 명재[明齋] 윤증[尹拯]선생이 1680년과 1701년에 각각 만들어 현재 종학당에 걸려있는 초학화일지도[初學畵一之圖]와 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를 통하여 상세히 엿볼 수가 있다.

종학의 전통은 명재 윤증때에 이르러 더욱 활발하게 운영되는 모습인데, 당시까지는 주로 병사와 정수암이 주요 거접처로 활용되었고, 독립된 서당으로서의 건물을 갖추는 것은 유봉에 건립되는 1817년의 종학당이 단초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현재의 위치로 이전, 규모를 일신하게 된 것은 1829년 과천공 윤정규 등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이때 반호 윤광안[盤湖 尹光顔]은 종학당 재건의 건축 자재와 400여권의 서책, 그리고 200석의 전답을 출연하였고, 이를 계기로 1829년 그의 4종질 과천 윤정규[果川 尹正圭]가 4칸 전후퇴의 건물을 마련함으로써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1853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하였으며, 1915년 대화재로 백록당과 정수루 일부가 불에 탔다.

종학당은 198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93호로 지정되었다가 1977년 원래의 유서대로 종학당과 백록당, 정수루를 하나로 합하여 유형문화재 제152호로 재지정 되었고, 시비의 지원을 받아 1999년에는 종학당, 2000년에는 정수루를 각각 원형복원 하였고, 이를 계기로 2001년 강당인 보인당과 함께 이 일원을 종학원으로 통칭하고 있다.

종학당 변천사를 되짚어 보자면 현재의 종학원에 건립 운영된 정수루와 백록당이 1628-1645년에, 종약 창설과 종학의 체계화를 통해 확립된 종학당으로 바로 선 것은 1645-1720년이고, 유봉 영당에 종학당을 건립한 것은 1817-1628년 경이었으며 현재의 위치에 재건한 것은 1829-1853-1893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종학당에서는 창건 후 300여 년간 헤일 수 없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요람이었으니 노종파의 대과 급제자만도 46명으로 그 어디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최초사학파평윤씨노종파종학원 3  

원형을 고스란히 살려 복원한 정수루의 모습이다. 특이한 것은 정수루의 처마에 백록당과 정수루의 현판이 같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국내최초사학파평윤씨노종파종학원 4  

당대 기호학파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장소로 이용하고, 여름 강의공간으로도 이용했을 정수루의 내부는 그 시대 건축의 멋스러움과 지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귀중한 건축 사료로 손꼽히고 있다. 

  국내최초사학파평윤씨노종파종학원 5  

정수루에서 바라보이는 병사 저수지의 너머로 파평윤문 재실이 있고, 학식을 널리 떨친 조상들의 묘소를 보며 학업에 정진했을 당대의 윤문자제들. 그들의 수학자세와 열의가 저절로 나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종학당의 홍살문을 향해 경사진 길을 내려오며 문득 생각나는 말 한마디...

채근담에  "앞에 가는 사람이여 갈팡질팡 가지마라 당신이 걷는 그 길이 후에 길을 가는 이의 지표가 되나니..."라는 말이 있다.

바른 길을 걸어 간 훌륭한 조상을 모신 가문으로서 파평윤문 노종파의 후손들은 지금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아니 굳이 윤문만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시대를 살아 가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화두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종학당을 끝으로 충청도 제일의 명문 가문을 찾아서...파평윤문 노종파의 이야기는 끝을 맺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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