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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공세리성당

2019.09.14(토) 14:57:06도희(ass1379@hanmail.net)

 
아산 공세리성당은 1890년 한국천주교회에서 아홉 번째, 대전 교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공세리 성지이다. 이곳은 한국천주교회의 시작부터 천주교 박해 때 손교한 순교자들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공세리성당은 초기 한옥식 가옥 구조였다가 지금의 고딕식 구조로 설립된 대표적인 교회 건축 양식이다. 내포 지방은 신앙전파의 중심이자 요람으로서 초대교회의 생활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는 천주교 복음 증거 자료인 유물전시실이 있다.
  

 

 

  
위 보호수는 공세리성당의 문지기 나무로 불리며 성당에 들어서는 이들의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한다. 웅장하게 뻗은 나무와 그늘에 잠시 머물면 세속의 지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정화되는 느낌이다. 지형에 맞춰 자란 굴곡진 뿌리와 패이고 갈라진 웅장한 나무줄기는 오랜 한을 안고 살아온 모습 그대로이다.
 
 

  

 
공세리성당의 역사는 이명래 고약으로 잘 알려진 드비즈 신부(1906)의 의료사업, 교육사업으로 빛난다. 드비즈 신부는 35년간 이곳에서 사목활동을 하다가 지병으로 귀국하여 선종하셨다. 내포 지방은 삽교천 바닷물이 내륙 깊이 밀고 들어오는 주변의 고을로 아산·신창·예산·정산·청양·대흥·덕산·면천지방 일대를 가리키는것을 알 수 있다. 내포 지방은 한국 천주교 발생 초기부터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것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의 전교 활동 때문이었다.
 

 
이곳에는 천주교 신유박해가 있었던 1801년부터 병인박해가 끝난 1871년까지 천주를 믿고 공경한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들이 모셔져 있다.
 

  


 

 
아산만에서 삽교천에 이르는 방조제 사업은 1756년 갈매리에 살다가 순교한 밀양 박씨 삼형제의 증조부인 박만선이 통진부사에서 퇴직한 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후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아들 박종학이 1784년부터 뒤를 이어 계속하여 준공하고, 유민 수백 가구를 모아 개간한 논을 주고 살게 하였다. 이로 인해 모원리, 신설리, 신원리, 서강리, 신밀두리, 갈매리 등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훗날 병인박해 때 밀양 박씨 가문에서만 10명의 순교자가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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