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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

목련꽃이 필때면

추사 고택의 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2024.04.04(목) 19:10:13 | 춘당 (이메일주소:yosaebi45@daum.net
               	yosaebi45@daum.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시샘을 하듯 변덕스런 봄비가 촉촉히 내리고 난 뒤의 들 풍경은 생기가 넘친다.
파릇한 연초록의 버들가지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삽교천 강가를 따라
 충절의 고장이자 비옥한 농경지에서 가을이면 황금사과가 열리는
예산의 용궁리로 추사고택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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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들녁을 적시는 삽교천

삽교천 뚝방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마을에 들어서면
추사가 25세 때 자제 군관으로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북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씨앗을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앞에 심었다는 백송을 먼저 만나게 된다.
백송은 중국 북부 지방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는 몇그루 밖에 없는 희귀한 나무이다.
하얀 수피를 가진 묘소 앞의 백송은 약 200년의 풍상을 겪으면서
원래 세 갈래의 가지 중에 두 가지는 고사(枯死)하였고
현재는 한 가지만 남아 외로이 힘겨운 세월을 지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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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송(白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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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을 지낸 추사의 고조부 '급류정 김흥경' 묘소

백송과의 해후를 마치고 자그마한 언덕을 넘어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열녀로 명정(命旌)된 화순옹주 홍문을 들른다.
화순옹주는 영조 임금의 차녀로 추사의 증조부이신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하여
김한신(金漢藎)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여 14일만에 부군을 따르고 말았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정문(烈女旌門)을 내리지 않았으나 후에 정조가 명정(命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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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和順翁主 紅門) *충청남도 유형 문화재 제 45호

홍문의 좌우에는 약간 시기를 놓쳤지만 현란한 산수유와
치열한 꽃송이를 다투어 피워내는 자목련이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담장 옆으로는 백송공원이 조성되어 되어 여러 그루의 후계목들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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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전경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과 그의 배필인 화순옹주가 묻힌 묘소 앞을 먼발치로 지나간다
야자매트가 깔린 탐방로 주변에는 수선화가 만발하여
생각잖게 눈이 부신 꽃길을 걷는 횡재를 누릴 수 있었다
***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은 13세에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에 봉해졌다.
인물이 잘생기고 총명하여 영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
벼슬은 오위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귀한 신분임에도 평소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지않고
항상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생활했다고 하며
특히 그는 글씨를 잘 써서 시책문을 많이 썼고 전각에도 뛰어 났다고 한다.

- 묘소 앞 비문에는 영조의 친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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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성위(月城慰) 김한신과 화순옹주 묘 *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 189호
  
수선화 길을 따라 넓은 잔디밭을 지나 추사가 태어나고 자란 고택앞에 다가섰다.
고택앞의 마당가에도 노란 수선화가 풍성한 황금빛으로 치장을 하고
봄나들이를 나온 상춘객들에게 설레임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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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과 수선화

 추사 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이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 선생이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며
주변에는 추사 선생의 묘, 월성위.화순옹주 묘와 정려문, 
그리고 백송과 화암사 등 추사 선생과 관련된 문화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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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에 화사한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사랑채는
바깥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마주치는 ㄱ자 형의 집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 조선 시대의 가택 관념으로
이는 유교적 윤리 관념에 근거한 것으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추사 고택도 엄연히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의 공간을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추사 고택은 문간채와 사랑채, 그리고 안채, 사당채가 따로 있다.
안채는 6 칸의 대청과 2 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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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의 담장을 휘감은 듯 수려하게 늘러뜨린 가지를 가득 채운 목련은
지금이 절정기로 그 아름다움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잎을 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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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험관

달관한 추사의 서체처럼 신묘한 자세로 추사의 묘소를 지키는 소나무는
원래는 한 가지였으나 자라면서 두 갈래로 갈라져
각기 자신의 멋스러움을 지니게 된 쌍소나무로 이 곳의 명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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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
추사 김정희는 초배(初配)인 한산 이씨와 계배(繼配)인 예안 이씨와 함께 합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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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묘

묘소 뒷쪽의 산중턱에도 수선화 꽃밭이 조성되어
솔바람을 맞으며 한가한 걸음을 즐길 수 있도록 정갈하게 가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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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좌상(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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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입상(立像)
 
                    추사 김정희 선생은 1786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이조판서를 지낸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에게 입양되었다.
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
벼슬은 병조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년간 유배생활을 지내다.
말년에 생부 김노경(金魯敬)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10월 10일(철종 7년) 별세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 사조의 구문화 체계를 탈피하여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하게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先覺者)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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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초상(肖像)

이제 탐방 마지막으로 '추사 기념관'을 둘러 본 후
추사의 글씨와 전각들을 조각해 놓은 기념관 앞에서 그늘을 찾아
잠시 목도 축이고 땀도 들인 뒤
추사 가문의 원찰이었던 오석산 아래의 화암사를 찾아 갈 궁리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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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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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선란(不二禪蘭)의 그림과 다양한 추사체의 글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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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글씨뿐 아니라 그림과 전각에도 뛰어 난 솜씨를 가졌으며
학문에서도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경학(經學), 금석학(金石學), 문자학(文字學)'
사학(史學), 지리학(地理學), 천문학(天文學)에 이르기 까지 박통했으며
저서로도 완당집(阮堂集)을 비롯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 담연재시고(覃?齋詩藁)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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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이라 할 수 있는 세한도(歲寒圖)
그는 이 그림을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려준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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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고 순결한 여성의 자태를 간직한 하얀 목련꽃이 피는 봄날
추사의 옛 고향을 거닐면서 그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춰 보고
앞다퉈 피어 난 꽃들의 자태에도 흠뻑 빠져 본 따뜻한 봄날의 하루가 아쉽게 지나갔다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충남 예산시 신암면 추사고택로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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