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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시간이 머무는 곳, 능안골 백제 귀족 무덤과 왕릉원

2021.07.27(화) 11:11:48충화댁(och0290@hanmail.net)



사비문을 지나 부여로 진입해서 부여 쪽으로 가다가 사비 터널을 빠져나오면 오른쪽 언덕에 한 무리의 무덤군이 보인다.
공동묘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왠지 고풍스럽고 권위가 느껴지는 묘지들이다.
지나다닐 때마다 항상 누구의 무덤인지 궁금했었다.
과연 보통 무덤이 아니라 사적 420호로 지정된 백제 고분들이었다.
부여의 관문에서부터 백제인들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바로 옆의 골짜기기 너머에는 너무 잘 알려진 능산리 왕릉원이 있어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는 곳이라 찾는 이가 별로 없다.
백제인으로 그 숨결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이곳 귀족들의 계곡에도 들러보기를 바란다.


▲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유골도 유물도 사라지고 봉분만 남아있는 무덤들.

1994년 공설운동장 공사를 하전 중에 발견이 되어 발굴 조사된 고분들이다.
발굴된 유물들로 추정하면 6~7 세기 사비 백제 시대의 호족과 귀족들의 무덤들이라고 한다.



백제 고분 12기와 60기의 고분이 발굴된 곳이다.
마을의 이름도 능의 안쪽에 있다고 해서 '능안골 고분군"으..로 불려 왔다.
이 고분군에서는 옹관묘, 토광묘, 백제 석실분 등의 무덤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백제 사비시대 귀족들의 무덤으로 순금 귀걸이, 은제 허리띠 장식들이 발굴되었다.
공설운동장 공사를 하다가 발견된 무덤군으로 이미 도굴되어 남아있는 유물들이 별로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옛 무덤의 형태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를 연구하는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겨울에 보면 봉분의 모습이 더 도드라져 보이지만 지금은 작은 언덕처럼 보인다.
발굴된 유물들로 추정하건대 백제의 귀족계층으로 추정되는 고분들이다.
학술적 가치를 떠나서라도 적어도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상념에 잠겨볼 만한 곳이다.
평범한 무덤 같아 보이지만 천년 세월 동안 부여를 지켜온 무덤들이다.

백제 시대 귀족층의 무덤의 구조와 변화 양상에 대해 연구할 가치가 있다.
격동의 세월을 지나는 동안 도굴을 당하고 훼손이 되어왔다.
부여 사람들이 지켜야 할 백제의 고분 문화를 만나 볼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옆 골짜기에 있는 왕릉원에 비해 초라해도 이곳도 천년의 시간이 머무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능산리 고분군에서 백제 왕릉원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된 후에 처음으로 들러보았다.
아직은 백제 왕릉원으로 변경하지 않은 안내판들이 남아 있다.
문화재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인식이 강해서 한번 정해지면 바꿔지기 힘들다고 한다.

백제 왕릉원을 둘러보기 전에 백제 귀족층들의 무덤이 한 계곡을 점령하고 있는 능안골 고분군부터 들러서 백제인들의 기상과 정체성부터 느껴볼 필요가 있다.
무덤 하나를 만들면서도 정성을 들여 돌을 다듬고 갈아내 석실을 만들어 관을 안치했다.
부장품들은 도굴당하고 훼손됐을지라도 무덤의 형태는 남아 후손들에게 천년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 천년의 바람이 머물고 있을 것 같은 백제 왕릉원.

천년의 격동의 세월을 묵묵히 안고 있는 원만한 능선 속의 왕릉원.



백제 왕릉원에는 3D 입체 화면으로 구현한 백제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기록이 많지 않아 유물들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백제를 360도 입체 화면으로 실감 나게 구성해놓았다.
백제의 고분 안에서 21세기 최첨단 테크닉을 접하는 체험이 가능한 곳이다.
시공간을 너머 이런 하이 테크닉을 가능하게 한 근간은 백제 왕릉원을 조성한 백제인들의 호방하고 자유로운 기상에 근거한다.




▲ 백제인의 하이테크가 적용된 무덤 속 석실 내부.

굴을 파서 일일이 돌을 다듬고 쌓아서 관을 안치할 공간을 만들었다.




▲ 백제 왕릉원을 지키고 극락왕생을 기원했을 사찰터.

터에 남아 있는 기초 공사의 흔적만으로 사찰을 복원한 모습.
5층 탑과 긴 회랑이 있는 건축 양식으로 왕가의 사찰다운 규모가 느껴진다.


▲ 백제 왕릉원에서 꼭 돌아보아야 할 필수코스가 된 국보 287호 백제 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대장간 터.

1993년 12월 주차장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陵山里寺址石造舍利龕)에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왕릉원의 사찰은 아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고자 왕실 차원에서 세운 원찰인 것 같다고 한다.

백제 왕릉원에서 금동대향로의 발굴은 백제 미학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21세기에 내놓아도 세련되고 우아한 백제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21세기 부여에서 백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이 금동대향로에서 나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백제 왕릉원에 전시되고 있는 일제 강점기 어느 날의 왕릉 앞의 어린이들의 사진. 

백년 전에도 기품을 잃지 않은 봉분의 모습이 그대로이다. 
천년의 바람이 왕가의 계곡은 피해간 듯하다. 
 


21세기 한여름의 무더위 속의 왕가의 무덤들은 말이 없다.
천년을 안고 있는 바람이 고즈녁하다.

백제 왕릉원 - 부여군 부여읍 왕릉로 61 041-830-2890 
능안골 고분군 -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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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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