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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구국의 투사 면암 최익현 선생을 만나다

6월1일은 의병의 날, 청양군 모덕사에서 그를 추모함

2021.06.17(목) 10:45:30김진순(dhjsdk44@hanmail.net)

이번 달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을 던진 호국 영령들을 기리는 달. 머리 숙여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청양에는 모덕사가 있다. 이 역시 절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기도 한데 이곳은 구한말 항일 구국에 헌신한  면암 최익현 선생 기념관이다.

모덕사 전경
▲ 모덕사 전경

이 모덕사에서는 지난 2016 전국 의병의 날 기념행사가 진행되기도 했는데, 의병의 날은 지났지만 뜻깊은 장소가 충남 청양에 있기에 모덕사를 찾아가 보았다.

면암선생 동상
▲ 면암선생 동상

모덕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는 최익현 선생 동상이다. 매섭고 부리부리한 눈매,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을 그분의 모습이다.

경내 연못
▲ 경내 연못

모덕사 경내에는 너른 연못이 있어 사철 선생을 추억하며 기리고 있다.

모덕사 안내문
▲ 모덕사 안내문

모덕사와 선생의 충절, 애국애족 정신을 담은 안내문.
모덕사는 청양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1913년 공덕사를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 공덕사는 광복 이후 중수를 몇 번 거쳤고 고종황제의 밀지에 나오는 "모경숙덕" 중 두 글자를 따서 "모덕사"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라 한다.

대의관
▲ 대의관

선생의 유품을 모아 전시 중인 대의관이 보인다.
이곳에는 조정에 회의 때 나가며 입었던 조복, 인장, 교지, 초상화 등이 다양하게 전시돼 있다.
 
선생은 19세기 말 외세가 이 땅에 밀려올 때에 가장 줄기차게 저항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유림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 과정에서 유폐된 땅인 대마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민족운동의 선봉으로 꼽혀왔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장령을 지냈고 정 3품의 반열에까지 들었다. 그러던 중 흥선대원군이 벌인 경복궁의 중건과 이에 따른 당백전의 남발에 대해 상소를 올린 탓으로 한직으로 밀려났다.

대의관 유품들
▲ 대의관 유품들

선생의 연보
▲ 선생의 연보

선생의 초상
▲ 선생의 초상

현판 면암. 이 면암이라는 한문 현판은 선생의 나이 14세때 그의 스승인 이항로 선생께서 직접 써 주신 아호라고 한다.
▲ 현판 면암.

이 면암이라는 한문 현판은 선생의 나이 14세 때 그의 스승인 이항로 선생께서 직접 써 주신 아호라고 한다.

그 뒤 양주에 은거해 있다가 다시 벼슬을 얻어 조정에 나갔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등의 비정을 공격했다. 이 무렵 서양세력과 일본이 외교통상을 요구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한다는 운동을 폈다.
저들의 침략과 약탈이 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통상이 곧 침략과 연결되는 것이다.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한 것이다.
이때 1900년께 포천에서 이곳 충남 청양군 정산면의 현재 집으로 거처를 옮겨 충청도와 인연이 시작됐다.

조정회의때 입었던 조복
▲ 조정회의때 입었던 조복

이항로가 선생에게 써준 낙경민직.
▲ 이항로가 선생에게 써준 낙경민직.

들
▲ 선생이 입었던 의복과 신발등.

이후 그는 다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붓을 멈추지 않고 글을 올려 항의하거나 중단을 요구했다. 을사조약의 체결 때에도 그는 헛된 조약이라 규정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어도 스스로 외교하지 못하고 타국을 시켜 외교하니 이것은 나라가 없는 것이요, 우리에게 토지와 국민이 있어도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타국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니 이것은 군주가 없는 것이다. 나라가 없고 군주가 없으니 우리 3천리 국민은 모두 노예이며 신첩(臣妾)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된다면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하다.”
 
그러나 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의병 봉기로 맞서며 강한 대일항쟁 의지를 천명했다.
의병을 모집하려 전라도 태인에 자리 잡고 봉기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무기와 병력의 열세로 제대로 싸워보지 못한채 붙잡혔고 대마도까지 끌려가 구금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비록 의병항쟁에는 실패했으나 그의 체포 소식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의병봉기의 본보기가 되었다.

대마도에 끌려가던 모습을 묘사한 그림.
▲ 대마도에 끌려가던 모습을 묘사한 그림.

그리고 조선의 화가 채용신은 바로 〈최익현 유배도〉를 남겼다. 선생이 일경에 붙잡혀 한양에서 부산까지 끌려가는 과정을 그림으로 남겼으니 실로 대단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청양군은 지난 2016년에 선생의 대마도 유배도와 영정 그림을 입수했다.
군은 백제문화체험박물관 전시물 자료를 수집하던 중 군산에 거주 중인 선생의 제자 한분이 선생의 영정과 유배도 각 1점을 보관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림을 넘겨받았다.
참 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고, 이렇게 소중한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와준 것만으로도 기쁘고 고마운 일이었다.

생가인 중화당(왼쪽)과 서고인 춘추각
▲ 생가인 중화당(왼쪽)과 서고인 춘추각

영정을 모신 제각
▲ 영정을 모신 제각


▲제각 현판  "성충대의". 다른 말이 필요없다.

그가 대마도에 끌려가던 때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선생이 대마도에 끌려가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7월 8일에 왜놈들이 최익현을 잡아다 대마도에 가두었다.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사령부에 갇힌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저항하며 굽히지 않자, 왜놈들이 마침내 등급을 나누어 형을 정했다. 문인 자제와 고관 유생 삼십여 명이 배웅하면서 통곡하다 실성하자 최익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들은 이렇게 할 필요가 없소. 거듭 폐를 끼치고도 죽지 못한 것이 부끄럽소.” 그러고는 흔연히 수레에 올라타고 떠났다.”
  
대마도에 간 선생은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다가 그 쌀이 조선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고 절식을 중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풍토병에 걸려 끝내 현지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최익현의 대의비인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가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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