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흰눈 속에서 만난 백의정승 명재 선생과 고택

기호유학의 중심 충청남도 논산시 문화재탐방

2020.02.17(월) 23:08:33계룡도령춘월(mhdc@tistory.com)



단정한 연못과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요?

이번 겨울에는 눈도 보지 못하고 넘어가나 싶었는데, 비록 습기 많은 무거운 눈이고 땅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기는 했지만 계속 내려주는 눈 덕분에 봄철 가뭄도 어느 정도 해갈은 될 것이고 산불도 예방하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내린 눈속을 헤치고 계룡도령이 달려간 곳은 백의정승 명재 윤증 선생의 후손들이 살아가는 300년 전통의 명가 충남의 자랑 논산시 노성면의 명재고택이랍니다. 
 

 
입춘이 지나고 내리고 있는 이번 겨울에 맞이하는, 눈다운 첫눈이라 반갑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명재 선생의 종손을 비롯한 후손들이 살고 있는 안채로 들어서면 대청마루에 '청백전가 귀은허청(淸白傳家 歸隱虛淸)' 편액과 대청마루 너머 장독대가 창문 너머로 보입니다.

대청마루 한가운데 걸려있는 세계 최고의 서예가 노정 윤두식 선생이 쓴 작품 '귀은허청(歸隱虛淸)'은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모든 것을 비우고 청정하게 지낸다'는 뜻인데, 명재 선생(1629~1714)은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며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를 올려 현실 정치에 참여했으며, 후손들이 허례허식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제사·가례 등에 검소함을 강조한 유훈과 함께 시문집 ‘명재유고’를 남겼습니다.

그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임금이 벼슬을 내려도 적당한 이유를 들어 이를 거부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아 얻게 된 ‘백의정승’이란 별칭과, '허한고와(虛閑高臥) 귀은허청(歸隱虛淸)'에 딱 맞아떨어지는 삶을 살다 간 그의 일생입니다. 

청빈의 삶을 살다간 명재 선생은 지금의 명재고택에는 들지 않고 가까운 유봉영당 근처의 작은 와가에서 살았답니다. 유봉영당은 경승제와 함께 있는데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중시한 명재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사후 30년인 영조 20년(1744)에 건물을 세우고 영정을 봉안한 곳입니다.
 

 
명재고택 안채 뒷마당의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장독대에서는 숨은그림찾기가 가능한데요, 306이란 숫자가 씌인 아주 특이한 항아리를 찾는 것이랍니다.

명재고택에서는 매년 깨지거나 누출이 있는 항아리의 숫자가 많아 옹기공장에 직접 주문을 넣어 제작해 공급받곤 하는데, 명재고택으로 간다는 표시가 바로 306이랍니다.

그럼 306은 무슨 숫자일까요? 정답은 명재고택의 주소인 교촌리 306번지를 의미하는 것이랍니다.
 

 
논산 노성면의 명재고택 안채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찍은 사진인데, 보기 힘든 사진입니다.

명재고택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지만 명재 선생의 종손을 비롯한 후손들이 생활을 하고 있기에 안채 출입을 제한하고 있는데, 계룡도령은 종손인 교동 윤완식 선생의 허락을 받아 들어간 것이니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논산의 명소인 백의정승 명재 선생의 기록이 남아 있는 명재고택의 백미 중 하나는 뭐니뭐니 해도 많은 광고 촬영 장소로 유명한 300년 전통의 이 장독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재고택은 여느 양반가와는 달리 외부와의 경계를 나누는 담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와 여성들이 생활하는 안채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현대주택의 현관과도 같은 대문과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낮은 담장 이외에는 없는데, 특히 완전히 외부로 노출된 사랑채는 대한민국 와가 고택 중 가장 과학적인 건축물로 전통건축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성지라고도 합니다.
 

 
사계절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액자인 사랑채 대청의 창문인데, 지금은 하얗게 눈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한옥 와가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저 눈 쌓인 채 보이는 멋스러움과 아름다움이라고만으로는 전부 다 표현되지 않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자연과 잘 동화된 모습이죠. 사람이 움직이는 곳곳 산책로에는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더군요.

방문객이 혹시라도 쌓인 눈 때문에 미끄러질까 염려해 눈을 깨끗이 쓸어 두었는데, 명재 선생의 종손인 교동 윤완식 선생의 배려이자 수고로움이겠죠?

한 사람의 수고로움이 여러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는데, 문화재 탐방을 목적으로 방문한 사람들 중 일부는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아 명재고택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경우가 자주 있답니다.

이날도 명재고택에서 생활하는 후손들이나 한옥체험을 위해 방문한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동에 스스럼없는 이를 보았는데, 사전 양해나 허락도 받지 않고 드론을 띄워 촬영을 하는 모습은 잘못된 것 아닌가요?

아름다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려고 몰려드는 사람들 중에는 남다른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인지 몰라도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들어가는 등 위험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데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소중히 여기고 아껴야 우리 후손에게도 물려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도 눈은 계속해서 내리고 있으니 좀 더 기대를 하고 기다려 볼까요?

한국 유학사에는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라는 양대 산맥이 있습니다.

그중 기호학파(기호유학)는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17세기 이후 발전한 기호 지역의 성리학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율곡(栗谷)학파가 그 중심축을 이루며, 율곡 이이(李珥) 이후 기호유학의 흐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흐름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으로부터 시작된 우계학파라 하겠습니다.

우계학파는 조광조의 문인인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과 성수종(成守琮)으로부터 시작돼 성혼으로 이어지는데, 성혼의 부친이 성수침이고 숙부가 성수종이랍니다. 성혼의 문인으로는 윤황, 황신, 이항복, 김상용, 이정구, 신흠, 이귀, 정엽, 조헌, 안방준, 김덕령 등이 있으며 특히 팔송(八松) 윤황(尹煌)은 성혼의 막내딸과 혼인하여 사위이자 제자로서 우계학을 계승하였는데, 이후 우계학은 파평윤문(坡平尹門)으로 계승돼 가학의 전통을 형성하게 됩니다.

우계학은 다시 나량좌로 학통이 이어지며 조선 후기 들어서 조선 정치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소론파(小論派)라는 정파적 성격을 갖게 되는데, 그 중심에 조선 최고의 사림이라 불리는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쓰기
댓글 작성

*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최종 수정일 : 2023-12-15
  • 게재된 내용 및 운영에 대한 개선사항이 있으시면 정보관리 담당부서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이 페이지에 대한 저작권은 충청남도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