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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춘마곡 봄바람 가득한 마곡사

백범 김구 선생과 유네스코 등재 마곡사의 모든 것!

2020.02.14(금) 14:02:26계룡도령춘월(mhdc@tistory.com)

충청남도에는 한반도 남쪽의 중심답게 많은 역사 유적과 아름다운 자연이 반겨주는 관광지들이 가득한데, 계룡도령이 봄바람 살랑이는 날 충남의 자랑인 춘마곡(春麻谷) 봄바람 가득한 마곡사를 찾아 백범 김구 선생과의 인연과 유네스코에 등재된 마곡사의 모든 것을 만나고 왔습니다.
 
태화산 마곡사 일주문
▲태화산 마곡사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山門) 중 첫 번째 문인 일주문(一柱門)은 기둥이 한 줄로 세워져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불교에서는 일심(一心)을 상징하며,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 세속의 번뇌를 한칼로 끊어내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상징적 문이랍니다. 하지만, 태화산 마곡사의 일주문은 일주문 정면 좌우 3개씩 도합 6개의 기둥이 있으니 3주문이라 불러야 하겠습니다.

일주문 기와지붕 아래에는 금빛으로 새겨진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라는 현판이 보이고 자동차는 그 옆으로 돌아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태화산 마곡사 남원 모습
▲태화산 마곡사 남원 모습

아직은 봄이라는 느낌이 없지만 졸졸거리며 흐르는 태화산의 마곡천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면 마곡사의 남원구역(영산전 영역, 수행공간)이 나타납니다.

태화산 마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이며, 말사로 계룡산국립공원의 갑사·동학사·신원사 등을 두고 있으며 백제 무왕 41년(640)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합니다. 고려 명종 2년(1172)에 보조국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절의 이름은 법문을 열 때 모인 대중이 삼밭의 삼대[麻]같이 많다 하여 마곡사(麻谷寺)라 이름 붙였다고도 합니다.

신라 말부터 고려 전기까지 폐사되었던 절로 고려 명종 2년(1172) 보조국사가 절을 다시 세웠으나 임진왜란 뒤 60년 동안 다시 폐사되었다가 훗날 조선 효종 2년(1651)에 각순대사(覺淳大師)가 대웅전·영산전·대적광전 등을 당시 공주 목사(牧使)와 중건하여 고쳐 지었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산세와 함께 디양한 볼거리를 가지고 있는 마곡사는 창건 당시 30여 칸에 이르는 대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을 비롯한 대광보전(大光寶殿, 보물 제802호)·영산전(보물 제800호)·사천왕문·해탈문(解脫門) 등의 전각들 및 5층석탑(보물 제799호)·범종(梵鐘, 지방유형문화재 제62호)·괘불(掛佛) 1폭·목패(木牌)·세조가 타던 연(輦)·청동 향로(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가 있으며 감지금니묘볍연화경(紺紙金泥妙法蓮華經) 제6권(보물 제270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충남과 공주지역에서는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매년 봄 마곡사 신록축제가 열린 만큼 봄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풍수지리적으로도 '택리지·정감록' 등에서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2018년 7월 2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충북 보은 법주사·전남 해남 대흥사·순천 선암사·경북 영주 부석사·안동 봉정사·경남 양산 통도사와 함께 충남 공주 마곡사가 등재되었답니다.

2018년 7월 2일 충남도는 지난 6월 30일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한국의 전통산사'가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최종 통과했다고 밝혔으며 충남 공주 마곡사 등 전국 7개 사찰이 세계유산 등재 심사를 통과한 것입니다. 이 사찰들은 중국적인 요소를 계승하면서도 한국의 독특한 형식과 공간을 보여줘 세계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또한 한국 불교만이 갖는 통불교적 사상과 의식, 승려 및 산사에서의 생활, 산사 문화 등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점도 평가됐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난 자연유산 및 문화유산을 발굴·보호·보존하기 위해 지난 1972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을 채택하며 시작됐습니다.
 
남원에 자리한 마곡사 해탈문
▲남원에 자리한 마곡사 해탈문(解脫門)
 
그 담장 아래로 마곡사의 북원공간(대웅보전영역, 예불공간)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으며 해탈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곡사 해탈문(解脫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모두 판장벽으로 막고 공포(拱包)는 3제공 형식으로 제공 상부에 조두형(鳥頭形) 돋을새김을 하고 제공에는 연꽃을 조각하였으며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양편에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과 보현(普賢) 및 문수동자상(文殊童子像)을 봉안하고 있는 마곡사 해탈문은 마곡사의 정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해탈해 불교 세계, 즉 법계(法界)에 들어가게 된다 하여 해탈문이라 한답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보현보살(普賢菩薩)
▲금강역사(金剛力士)와 보현보살(普賢菩薩)
 
우락부락한 인상의 금강역사와 중생들의 수명을 연장시켜주는 덕을 가졌다고 해서 보현연명보살, 연명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문수보살과 함께 석가모니부처의 협시보살로 부처의 오른쪽에 있으면서 부처의 이덕(理德)과 행덕(行德)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은 흰 코끼리를 탄 형상과 연화대 위에 앉은 2가지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남원에 자리한 마곡사 천왕문
▲남원에 자리한 마곡사 천왕문(天王門)

마곡사 천왕문(天王門)은 마곡사의 문들 중 해탈문에 이어져 있는 두 번째 문으로 건립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내부에 걸린 편액(篇額)에 1910년 6월에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히 그 이전에 지어진 것이겠죠?
 
천왕문의 내부에는 사천왕 그림이 있었다가 언제인지는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안치되어 있으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2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마곡사 북원으로 가는 극락교
▲마곡사 북원으로 가는 극락교

마곡사가 있고 산책로는 물론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찾는 사람들이 많은데 태화산(泰華山)은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신풍면·유구읍에 걸쳐 있는 산이며, 높이는 416m로 공주시에서 서북쪽으로 24km 떨어져 있습니다. 산 중턱에는 상원폭포와 마곡사가 있지요.

산행을 하려면 이곳 마곡사 극락교에서 왼쪽 방향으로 길을 잡아 가면 능선을 따라 정상에 오르면 됩니다.
정상에 오르면 가까이 서서남 방향의 칠갑산과 동쪽으로 무성산이 보이고 멀리 동동남 방향으로는 계룡도령이 사는 계룡산국립공원과 공주 시내가 바라다 보인답니다.

꽃이 피는 3월이 되면 제대로 한 번 야생화 탐사를 겸해 둘러볼 생각인데 같이 하실 분들이 계시면 연락이나 댓글 남겨 주세요!!
 
마곡사 범종루
▲마곡사 범종루
 
극락교를 건너 마곡사의 북원으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범종루가 반겨주는데요, 새로이 단장한 亞(아)자형 범종루 그 뒤로 마곡사 종무소가 있고 더 안으로 들어서면 관음전이 있으며, 관음전 지하에 공양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점심 공양을 하고 마곡사 탐방에 나섰습니다.
 
마곡사 다보탑과 대광보전
▲마곡사 다보탑과 대광보전
 
점심 공양을 마친 후 범종루의 좌측(관음전에서 나오면 우측)으로 들어서면 5층석탑(다보탑)과 마곡사의 본당이 나타나는데, 탑 뒤로 두개의 기와지붕이 보이죠? 마곡사에는 특이하게도 오층석탑인 다보탑과 대광보전 그리고 대웅보전이 일직선상에 이어서 세워져 있습니다.

마곡사 5층석탑(五層石塔)은 다보탑이라고도 부르며 마곡사에 현존하는 유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13세기 몽골 간섭기에 세워진 것이라고 합니다. 높이 8.7m, 탑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기단(基壇)을 2단으로 높이 쌓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후 탑의 끝부분에 라마탑에 보이도록 풍마동 머리장식을 올린 모습입니다. 지붕돌 폭의 변화가 거의 없이 길쭉한 느낌이라 안정감이 적고 청동으로 만들어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이 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으로 중국 원나라의 라마탑과 그 모습이 비슷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광보전이 불탔을 때 크게 훼손되었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탑 안의 보물들을 거의 도난당하였으나 1972년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고, 1974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합니다. 1984년 11월 30일 보물 제799호로 지정 보전·관리되고 있습니다.
 
마곡사 심검당
▲마곡사 심검당(尋劍堂)
 
마곡사의 요사체 심검당(尋劍堂) 모습인데 ’ㄷ’자형으로 지어져 있으며 뒤로 돌아가면 창고인 고방이 있고 그 맞은 편에 새로 지어진 관음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광보전 전면 우측(동쪽)에 자리한 요사의 기능을 지닌 수행 공간인 심검당의 ’심검(尋劍)’은 지혜를 벤다는 의미로 ’반야지혜’를 상징하며 전각 내부의 편액에 1856년(철종 7년)에 중수했으며, 1909년(순종 3년)에 기와를 새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19세기 초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심검당과 고방(창고)이 하나로 묶여 현재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심검당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한 관리로 이름난 송하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로 위 사진 왼쪽에 자그마하게 붙어 있는 마곡사 현판의 경우 근대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 의 글씨라고 합니다.
 
마곡사 대광보전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심검당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곡사 5층석탑과 대광보전이 나타나고 그 뒤로 중층 구조의 대웅보전이 보입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인 마곡사 대광보전은 1788년과 1831년에 중창된 것으로 알려진 단층의 불전입니다.

내부에는 불상이 안치된 불단이 동쪽에 있어서 내부 공간의 방향과는 직각을 이루게 되지만 불규칙하게 세워진 높은 기둥들의 기둥열은 내부의 공간적 방향성과도 무관하게 내진고주(內陣高柱) 5개를 불규칙하게 배열해 상부 가구도 특이하게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여러 차례 중창과 중수를 거치면서 이와 같이 변한 것으로 보입니다. 편액은 영정조 시대 예원의 총수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글씨라고 합니다.

보물 제802호로 지정된 대광보전은 지혜와 광명의 상징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마곡사의 금당인데,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을 사찰에 따라 대적광전, 적광전, 대광명전 등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마곡사 중심 전각 중 하나입니다.

마곡사 응진전(麻谷寺 應眞殿)
▲마곡사 응진전(應眞殿)
 
마곡사 심검당 맞은편에는 아주 특이하게 바닥을 향해 옆으로 자라는 소나무가 있고, 그 뒤에는 응진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봄이 되면 화사한 꽃들로 가득해지면서 아주 화려하게 변한답니다. 

아라한전(阿羅漢殿)이라고도 부르는 응진전은 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라한을 모신 전각을 말하며 마곡사의 응진전에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고 아난(阿難)과 가섭(迦葉)을 협시불로 모시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을, 끝에는 법천(法天)과 제석천(帝釋天)을 함께 모셨는데 십육나한은 수행을 완성하여 성자의 지위에 오른 존재로, 중생에게 복을 주고 바른 법으로 인도하는 불제자를 말합니다. 1852년(조선 철종 3)에 중수한 응진전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그런 응진전 오른쪽으로 건물이 하나 보이죠? 무슨 건물일까요?

백범 김구 선생 거처(현 기념관)
▲백범 김구 선생 거처(현 기념관)
 
오늘의 마곡사가 있기까지 역사 속에서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근대사에 가장 큰일이었으며 오늘의 마곡사가 사찰 이외의 명성을 더하게 된 것은 바로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이라 하겠습니다.
김구 선생은 청년 시절인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하여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를 살해한 뒤 인천감리서 복역 중 탈옥하고 전국을 떠돌다 공주 마곡사에 은거하면서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입산수도 생활을 했으며 이때 마곡사에서 민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높은 뜻을 세웠다고 합니다.

광복 이후 사찰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은 대광보전 주련에 새겨진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라는 문구를 본 뒤 당시를 회상하며 경내에 한 그루 향나무를 심었고 서거 이후에는 이곳에서 49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참, 각래관세관 유여몽중사'란 구절의 뜻은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곡사 주변에는 백범명상길로 명명된 '솔바람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길 한곳에서 불사가 진행되고 있네요.

마곡사 대웅보전(麻谷寺 大雄寶殿)
▲마곡사 대웅보전(大雄寶殿)
 
솔바람길 오른쪽으로 경사길을 오르면 만나게 되는 마곡사 대광보전 뒤에 자리한 중층의 대웅보전의 모습입니다.

보물 제80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중층으로 건축된 대웅보전은 내부 공간은 통층으로 임진왜란 때에 불탔다가 조선 효종 때(1651)에 중수했지만, 또 불이 나 그 뒤 1785년에서 1788년에 걸쳐 중창된 것으로 대웅전 혹은 대웅보전이라 부르는 전각은 법화경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큰 영웅이라 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석하시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양옆에 약사여래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부처님들은 공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를 대표하므로 삼세불이라고도 부른답니다.
 
그리고 대웅보전의 내부에는 네 개의 싸리나무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여기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아들이 없는 사람에게는 마곡사의 싸리나무 기둥을 안고 돌면 아들을 낳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싸리나무 기둥은 반질거리며 윤기가 나고 손때가 묻어있답니다. 지금과는 달리 아들을 낳고 싶은 여성이 많아서이겠지요?
 
봄바람과 청량하게 흐르는 마곡천
▲봄바람과 청량하게 흐르는 마곡천
 
얼음 한 조각없이 거침없는 흐름을 보이는 마곡천 위에 세워진 마곡사 극락교를 되건너 넘으면 특이하게도 대광보전, 대웅전 뒤나 옆의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일반적인 산신각과는 달리 별도(?)의 장소, 명부전 위에 위치해 있는 산신각을 만나게 되는데 산신각은 마곡사 명부전 뒤에 있답니다.
 
남원에 자리한 마곡사 명부전(麻谷寺 冥府殿)
▲남원에 자리한 마곡사 명부전(冥府殿)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64호로 지정되었으며 1939년에 건립하였다는 명부전(冥府殿)의 뒤쪽으로 검은 기와지붕이 보이죠? 그곳이 마곡사의 산신각이랍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 곳으로 시왕전(十王殿), 지장전(地藏殿), 명왕전(冥王殿)이라고도 불립니다. 시왕은 인간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죄가 크고 작음을 가리는 10명의 왕으로 염라대왕은 그중의 다섯 번째 왕이며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구원의 이상을 상징하는 자비로운 보살로 모든 인간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돕는 보살입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계속 더 들어가면 영산전이 나오지만 이번에는 수행공간으로는 들지 않고 그냥 돌아 나왔습니다.
 
마곡사 산신각(麻谷寺 山神閣) 가는 길
▲마곡사 산신각 가는 길
 
마곡사 산신각은 다른 사찰의 산신각과는 달리 전각이 크고, 산신각의 안에 걸린 탱화는 나무와 호랑이들 그리고 여신과 남신 그리고 시녀 동자 등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 조금 색다른 듯합니다.
 

 
이번 태화산 마곡사 나들이에서 달라진 점을 발견했는데 천왕문과 우측의 담장 아래 작은 돌들로 쌓은 수백개의 돌탑들이 놓여 있는 점입니다.
 
이 외에도 소개할 곳이 엄청나게 많지만 지면 관계상 이 정도로 줄이니 직접 방문해서 하나하나 찾아 보는 즐거움을 느껴 보세요.


 
태화산 마곡사를 돌아서 나오는 길은 산새들의 노랫소리와 맑게 흐르는 개울 물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아직 제대로 된 봄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봄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목재 데크길 왼쪽의 개울에는 여름이면 노랗고 빨간 물봉선이 가득 피어 화사하게 빛나는 곳이랍니다.
 
마곡사를 다녀오면서 든 생각이 있어 마무리에 올려 봅니다.
 
우리 민족은 일만 년의 역사에 걸친 평화지향적인 역사와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문화를 가진, 최소한 조선시대까지만 보더라도 우리 민족은 세계 최고의 지성과 교양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며 왕이 신하들과 토론을 통해 국정을 운영했고, 함께한 그들은 성리학이라는 심오한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로 기근이 들어 굶어도, 종교를 이유로도 다른 나라를 침략할 줄 몰랐고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여겼는데 당시 서양은 어땠나요?

종교와 재화를 위한 전쟁과 침탈에 의한 피와 약탈로 점철된 역사를 이어오지 않았나요? 그래서 그런지 근세에 와서는 자연 재해나 인위적인 재해가 발생해 조금만 공권력이 못 미쳐도 방화와 약탈을 일삼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주먹밥을 빚는 등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평화주의적 민족입니다.
그런 파괴와 침탈의 역사를 가진 자들이 주창하는, 유네스코 같은 단체로부터 인증을 받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 싶은 생각을 한 번씩 합니다.

우리 땅 구석구석 새겨진 유물과 자연과 풍속은 누구의 인증이나 상을 받지 않아도 지구 최고이지 않나요? 한 마디로 우리는 스스로가 세상 그 어떤 문화보다 앞서 있음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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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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