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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화의 ‘잔영’ 천년사찰 성주사지(寺趾)

세월의 무게에 비친 쓸쓸함, 그리고 적막감

2019.12.01(일) 12:13:06장군바라기(hao0219@hanmail.net)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聖住寺址) 전경.▲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聖住寺址) 전경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지(聖住寺址)'는 유명 사찰처럼 입장료나 주차장 비용을 내지 않습니다. 일주문 근처까지 들어찬 기름 냄새를 풍기는 음식점도, 흔한 기념품가게 한 곳도 운영되지 않습니다. 관광지의 호객 대신 쓸쓸함과 적막감이 방문객을 맞습니다.
 
막상 사지에 들어서면 대웅전이 없으니 부처님께 절을 올려야 할 일도, 불사를 빙자해 자신의 복을 빌 필요도 없습니다. 덩그러니 놓인 석탑과 석불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풍경처럼 보입니다. 성주사지의 시간은 그렇게 일상과 주변에 멈춰 있었습니다.

1000여 년 전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성주사'는 화려한 전각과 불탑, 수천의 수도승과 불자들이 염불을 외우며 도량을 닦던 곳입니다. 당시 공양미와 공물이 산처럼 쌓였겠지만, 이제는 모두 빠져나간 겨울 바다의 고적함이고 초겨울 들판의 적막함만 남았습니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창건한 ‘오합사’에서 시작됩니다. 이후 삼국을 통한한 신라 문성왕(839~859) 당시 '낭혜화상 무염'이 가람을 중창해 성주사로 바꿨다 합니다. 신라말 ‘구산선문’의 하나로 승려만 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사찰규모가 컸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불타 지금은 절터만 전해집니다. 1968년과 1974년 2차례 발굴조사로 백제에서 통일신라·고려에 이르는 각종 자료가 출토됐습니다.
 
성주사지(사적 308호)에서 만날 수 있는 문화재는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를 비롯해 5층석탑(보물 19호),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남 유형문화재 33호) 등이 있습니다.
 
사지로 들어서면 먼저 보물 19호 성주사지 5층 석탑과 마주하게 됩니다. 법당 자리로 추정되는 곳의 마당에 높이 6.6m로, 2층 기단 위에 5층으로 세워졌습니다. 탑신과 기단 갑석 사이에 별도의 굄을 사용해 통일신라 말기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971년 해체 수리공사 단시 1층 탑신 윗면에서 사리공이 발견됐지만, 유물은 없고 사리공의 석재 뚜껑만 있어 이미 도굴당한 상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19호)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19호)

5층 석탑의 앞에는 석등이 있습니다. 이 석등은 수년 전 성탄절을 앞두고 누군가 일부러 쓰러뜨려 깨어진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5층석탑을 돌아 금당(金堂)을 오르는 석계단 역시 좌우의 사자상이 1986년 도난당하자 이전 사진을 기초로 복원해 놓은 모습입니다.
 
성주사지 석등.
▲성주사지 석등, 석등의 오른쪽 일부가 훼손돼 있다  

성주사지 금당 계단. 사자상을 도난당해 새롭게 복구해 놓았다.▲성주사지 금당을 오르는 계단, 사자상이 1986년 도난돼 사진을 기초로 복원했다
 
▲ 성주사지 금당계단 좌우 복원 사자상. ▲성주사지 금당계단 좌우 복원 사자상
 
성주사지 발구조사를 통해 찾은 주춧돌.
▲성주사지 발구조사를 통해 찾은 주춧돌
 
성주사지 ‘금당’터를 돌아서면 비슷한 모양의 석탑 3기가 특이하게 일렬로 연이어 늘어서 있습니다. 모두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높이 4m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광불·약사불·가섭불의 사리탑으로 지대석 위에 놓인 하대석은 4개의 판석으로 각 면에 상대석과 같이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습니다. 상륜부는 파손이 심한데 이 역시 1971년 탑을 해체·수리했을 때 사리장치는 이미 도굴당한 상태였습니다.
 
성주사지 3층석탑. 3기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성주사지 3층석탑, 3기가 일렬로 배치돼 있다
 
사진 왼쪽부터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왼쪽부터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3층 석탑의 오른편 뒤편(동북방면)에는 석불입상이 있습니다. 석불은 얼굴 부분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석불의 코를 갈아 먹으면 아들을 얻는다’는 속설에 코를 시작으로 점차 얼굴 전체가 훼손됐다고 전해집니다. 일제강점기 인근에 거주하던 무속인이 콘크리트로 훼손된 얼굴 형상을 덧씌웠지만, 시멘트에서 흘러내린 화학성분이 석불 자체를 훼손시키자 이처럼 훼손된 2차 원형의 모습을 복원했다고 합니다.

보령성주사지 석불. 민간신앙의 영향으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돼 있다.
▲보령성주사지 석불, 민간신앙의 영향으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돼 있다. 
 
탑들을 모두 살폈으면 성주사지 대표유물인 국보 8호의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를 접견할 차례입니다. 서기 890년(진성여왕 4년)에 세워졌는데 비의 전체 높이가 4.55m, 비신 2.63m, 너비 1.55m, 두께 0.43m로 현존하는 신라의 석비 가운데 가장 큰 비문입니다.
  
중국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이 성주사에서 입적하자 2년 뒤 세웠다고 적고 있습니다. 비문은 당대 최고 문장가인 최충헌이 짓고, 글씨는 해서체로 당대 최고 서예가 최인곤이 썼다고 합니다. 통일신라의 사회상과 금석학 연구에 중요 자료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비문은 정면에서 바라보면 귀부의 오른편이 파손됐지만, 비신과 이수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습니다. 4면에 새겨진 구름과 용이 생동감 있게 조각돼 있습니다.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사진 시계방향으로 정면, 왼쪽, 뒤, 오른쪽 모습.▲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사진 시계방향으로 정면·왼편·뒤·오른편 모습
  
성주사지 돌담길. 사지 둘레를 따라 설치돼 있다. ▲성주사지 돌담길, 사지 둘레를 따라 설치돼 있다
 
성주사지를 둘러보는 것은 2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때문에 인근 성주산자연휴양림을 찾으면 좋습니다. 1993년에 개장한 500만㎡ 규모의 휴양림은 하루 출입인원을 1000명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숲길을 걷다 보면 초겨울인데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산림과 기암괴석, 맑은 계곡이 절경을 이룹니다.
 
도로 옆에 갈대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서면 아직도 남은 단풍길이 나타납니다. 여름철에는 계곡물을 이용해 수영장을 운영한다고 하는데 지금은 마지막 단풍구경을 하면서 편백나무숲으로 갈 수 있습니다.
 
성주산 자연휴양림 계곡물의 갈대밭.
▲성주산 자연휴양림 계곡물의 갈대밭
 
성주산 자연휴양림의 단풍.
▲성주산 자연휴양림의 단풍
 
상주산 자연휴양림 ▲성주산 자연휴양림 숲속의 숙소

휴양림에는 방갈로 형태의 숙소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예약은 인터넷으로 간단히 할 수 있습니다. 시간 여유가 된다면 가족·친지들과 성주산과 성주사지를 찾아 호젓한 초겨울을 즐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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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 수정일 : 20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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