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백제 의자왕의 의지가 담긴 공주 신원사

2019.09.12(목) 08:41:39지민이의 식객(chdspeed@daum.net)

651년 백제의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다. 이때 백제의 사신이 당나라에 조공하러 가자, 당 고종은 고구려·신라와 전쟁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고구려는 보장왕이 다스리고 있었고, 신라는 진덕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진덕여왕은 왕위 계승자로 내정된 김춘추의 양보로 즉위하였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의 보좌에 힘입어 즉위한 지 9일 만에 비담의 난을 종식시켰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국왕(혹은 31대 국왕)이며, 이름은 부여의자(扶餘義慈)며 망국의 군주이기 때문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계룡산 자락에 자리한 공주의 삼대사찰 중 한 곳인 신원사는 의자왕대에 만들어진 사찰이다.  
 

 
을유에 백제에 보냈던 사신 대인(大仁) 아즈미노무라치[阿曇連] 히라후[比羅夫]가 쓰쿠시국[筑紫國]에서 역마를 타고 와서 말했다. 

“백제국은 천황(天皇)께서 붕어하셨다는 말을 듣고 조사(弔使, 조문 사절)를 보내왔습니다. 신은 조문 사절을 따라 함께 쓰쿠시국에 왔습니다. 신은 장례에 참석하고자 먼저 혼자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 나라는 대란(大亂)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의자왕은 무왕의 뒤를 이어 부강한 백제를 만들려고 했던 백제의 마지막 군주였다. 이곳 신원사를 보덕화상을 보내 창건하게 만들었다. 공주는 사비시대 이전의 고도였기에 백제에게는 중요한 요충지이며,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주에 신원사 같은 고찰을 창건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중악단에 편하게 쉬고 있는 개가 무척이나 평온해 보인다. 자주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는 않다.
 

 
부여에 가면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가 부여 궁남지에 그려지고 있다. 그럼 어머니인 선화공주와 의자왕의 사이는 어떠했을까. 왕좌라는 것은 형제라도 나눌 수가 없기에 불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선화공주가 죽자마자 의자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동생을 포함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고, 이것은 의자왕과 선화공주 간의 갈등 관계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태자로 책봉된 이유를 암시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곳을 창건하게 한 것은 651년이니 의자왕의 힘이 백제의 전반에 미치고 있었을 때였다. 642년(의자왕 2년)에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라의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성을 빼앗았다. 이어서 장군 윤충(允忠)이 신라의 옛 가야 지역에 두었던 최대 거점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키고 주민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백제의 서부 지역 고을에 나누어 살도록 하기도 했다.
 
신원사는 중악단이라는 조선시대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 있어서 정치인들이 매년 새해만 되면 와서 빌고 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내년에 총선이 있으니 2020년에는 이곳이 꽤나 북적거릴 듯하다. 이곳을 창건하였다는 보덕화상에서 '보덕'은 말 그대로 '두루두루 덕을 미치게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보덕각시, 보덕사, 보덕이 암, 보덕암, 보덕굴 등 보덕을 사용한 곳이 꽤나 많다.  
 
 
원금당지를 중심으로 석탑이 있는 이외의 현재의 신원사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대웅전의 우측에 독성각이 좌측에는 영원전이 있는데, 이들은 최근에 신축 혹은 개수가 이루어져 있다. 신원사의 유물로는 대웅전이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0호,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인 5층석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계룡산 중악단'은 보물 제1293호다.
  
이곳이 창건된 651년은 백제에게 있어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해다. 651년 백제는 당에 조공 사절을 보내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당이 신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반환하라고 하자 652년(의자왕 12년) 이후로는 당과의 교섭을 중단했고, 이후 백제와 당의 외교관계는 멸망 시까지 단절되었다. 
 

 
대웅전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명절 때 돌아보기에도 괜찮은 여행지이며 사찰이다. 당에 사신을 보내면서도 의자왕은 새로운 꿈을 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과 외교를 단절한 의자왕의 정치는 655년(의자왕 1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태자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 656년(의자왕 16년) 3월에는 궁인과 더불어 밤낮으로 사치스러운 잔치를 매일 열면서, 이에 대해 간하고 식장산의 방어를 말했던 좌평 성충(成忠)을 옥에 가둬버리기까지 한다.
  

 
대웅전에는 전내에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하여 우측에 대세지보살을, 좌측에 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계룡산이 영험해서 그런지 몰라도 주변의 암자로는 고왕암, 등운암, 선광원, 소림원, 불이암, 금용암 등이 있다.
 

 
한성, 공주, 부여로 수도를 옮겨가면서 역사를 이어가던 백제는 사찰을 창건하여 그 힘을 빌리려고 했다. 651년(의자왕 11)에 열반종(涅槃宗)의 개산조 보덕(普德)이 창건한 이 사찰은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아 있던 절을 중창하였고, 1298년(충렬왕 24)에는 무기(無寄)가 중건하였다. 신원사의 부속암자 중 백제 패망의 해인 660년(의자왕 21)에 창건한 고왕암(古王庵)이 남아 있다.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쓰기
댓글 작성

*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최종 수정일 : 2023-12-15
  • 게재된 내용 및 운영에 대한 개선사항이 있으시면 정보관리 담당부서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 이 페이지에 대한 저작권은 충청남도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상단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