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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의 기개가 느껴지는 홍성 생가지

2012.06.29(금) 01:12:34쟈스민(mee0102@naver.com)

 


홍성에는 대한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였던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이 태어나고

성장한 김좌진 장군 생가지가 있다.

1991년부터 이곳의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어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이 건립되었다.

생가지 뒤편 높은 곳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사당 백야사가 있다.

 

 

과거 생가지 뒤편에는 일본이 우리나라의 정기의 맥을 끊기 위해

담장 뒤로 가운데를 뚝 잘라 도로를 냈었다가

그것을 홍성군에서 메꾸고 백야공원으로 꾸며 볼거리와 쉴자리를 만들었다.

'백야'라는 호는 '우리 백의민족은 심신을 단련해서 단단해져야 일본을 꺽을수 있다'는 뜻을 품고있다.

 

 


김좌진 장군에 대한 설명을 제대로 듣기 위해 문화해설사님과 함께 하였는데

끊임없이 쏟아지는 해설사님의 설명은

 김좌진 장군만큼이나 호탕하고도 기개가 넘치셨다.

 

 

김좌진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나라가 위급할때 조국을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났던 조선의 명문가이며 혁명가 집안이었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고종 26년) 김형규의 둘째아들로 태어났고

3살때 부친상을 당해 양 할머니와 어머니 슬하에서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총명하게 성장하였다고 한다.

 

 

어릴 적에는 동네아이들을 모아놓고 말타기며 병정놀이를 하면서

꼬마대장 노릇을 도맡아 했는데 항상 대장깃발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 깃발에는 '강한자는 누르고 약한자는 돕는다.' 는 뜻의

'억당부략'이라 씌어 있었다고 한다.

아침에 나갈때면 할머니께서 새옷을 입혀 보냈지만

 집에 돌아올때는 가난한 친구에게 옷을 모두 벗어주고는 늘  알몸으로 돌아올 정도로 어릴때부터 나보다는 우리를, 조국을 먼저 생각했다고 한다.

 

 

6살때 할머니에게 99칸 대궐집, 3천석의 전답,

집안 노비 30여명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게 된다.

15살에 30여명의 노비를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3천석의 전답은 소작인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골고루 나눠주었다.

 


1907년 18살에 99칸의 집에다 호명학교를 세우고 교장으로 취임해 신학문을 교육하였고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 독립투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고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민족의 자주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김혁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29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에 올랐다.
1930년 1월 공산당원 박상실의 흉탄에 맞아 순절하였고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 김좌잔 장군 기념전시관

 

 

 

문화해설사님의 생생한 해설을 들은 후 기념전시관을 둘러보니

김좌진 장군의 생애가 한 눈에 그려졌다.

 

 

 

▲ 김좌진 장군이 평소 좋아하던 국수를 담았던 실제 국수 사발

 

대식가인 김좌진 장군에 대한 유명한 일화는

'김좌진 장군은 한 자리에서 말술과 함께 갈비 한짝,

염통 한 개를 먹더라. 특히 국수를 좋아해 한 번에 5사발을 먹곤했다.' 고

동아일보에도 전해진다.

 


▲ 노비문서를 태워 30여명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전답을 소작인들에게 나눠 주고 잔치를 벌였던 일화

 

▲ 대한독립선언서

 

▲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 사상 가장 빛나는 전과를 올린 청산리대첩
 

 

김좌진 장군 생가지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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