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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방포항에 깃든 천연기념물의 아우라(Aura)

모감주나무에게 듣는 자연의 마법같은 가치

2021.06.01(화) 14:06:37 | 나드리 (이메일주소:ouujuu@naver.com
               	ouujuu@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항구의 풍경은 단조롭다. 바다 위로 쏟아지는 6월의 황금빛 햇살은 파도 위에서 바글거리고, 파도 위를 스치던 바람은 고운 모래 속으로 스며든다. 코발트 빛 하늘에 갈매기들이 날개로 표현하는 자유는 무질서하고 시끄럽다. 갈매기가 허공에서 외치던 자유는 모래 위에 발자국으로 그려지고 파도는 자유의 발자국을 슬며시 지워버린다. 갈매기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능쟁이는 황급히 모래 구멍 속으로 몸을 피하고 두 눈을 잠망경처럼 사주경계를 한다. 하늘과 해변의 경계선상에 있는 생명체들은 자신의 영역에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꽃지의 꽃다리에서 바라 본 방포항의 모습
▲ 꽃지의 꽃다리에서 바라 본 방포항의 모습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없다. 쪽빛으로 마주 보는 하늘과 바다는 구분될 수 없고 서로가 거울을 보듯이 투영된 모습이다. 쪽빛 파도에 밀려온 망둥어는 촐싹대면서 항구에서 수영 솜씨를 뽐내는데 그 모습이 산만하기만 하다. 항구의 한적한 곳에 정자가 있고, 정자 안에서는 마을 어른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고 있다. 아름다운 미소가 가득한 할미의 보조개 속으로 어린 손자는 손가락을 넣으면서 깔깔거리는데, 그 웃음소리에는 사이다의 청량함이 묻어있다. 그 옆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할아버지의 검게 그을린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고 손길은 여유로움이 넘쳐난다. 이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이곳은 태안반도의 끝자락 안면도 방포항이다.

방포항 입구에서 바라 본 항구의 모습
▲ 방포항 입구에서 바라 본 항구의 모습

천혜의 자연풍경이 펼쳐진 해안 국립공원에 위치한 ‘방포항’에는 특별한 자랑거리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모감주나무군락'이다. 안면도 모감주나무군락은 1956년 천연기념물 138호로 지정되었고,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되면서 1962년 12월 3일에 재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태안에는 4개의 천연기념물이 존재하는데, 이곳 ‘모감주나무군락’, ‘난도 괭이갈매기 번식지’, ‘신두리 해안사구’, ‘내파수도 해안지형’이다. 그리고 방포(傍浦)항의 본래 행정지명은 안면읍 승언리 '젓개마을'이다.

모감주나무가 푸른 잎을 확장하고 있다
▲ 모감주나무가 푸른 잎을 확장하고 있다
 
승언리에서는 젓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무학대사가 젓개 북쪽의 작은 산 중턱에 아담한 사찰을 짓고 수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절을 건립한 뒤로 젓개 앞바다에서 선박이 암초에 걸려 좌초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한다. 밤에 인근 바다를 지나는 배들이 절에 켜진 불빛을 보고 등대로 착각하여 가까이 접근했다가 암초와 부딪쳤기 때문이다. 사고의 원인을 알게 된 무학대사는 절을 버리고 간월도로 옮겼고, 이후로는 배가 좌초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젓개란 지명은 당시 포구 곁에 절이 있었다 하여 ‘절개’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하여 젓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다쪽에서 바라 본 모감주나무군락의 모습
▲ 바다쪽에서 바라 본 나무담장으로 보호하고 있는 모감주나무군락의 모습 

승언리는 안면읍의 소재지가 되는 마을이다. 승언리는 조선시대 서산군 안면면의 지역이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18세기 중엽의 승언리는 103호로 안면도에서 가장 큰 마을로 나타난다.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태안군 안상면의 관할구역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창기리와 정당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승언리라 하고 서산군 안면면에 편입되어 그 소재지가 되었다. 1980년 12월 1일 대통령령 제1005호에 따라 안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9년 1월 1일 태안이 서산군에서 분리됨에 따라 태안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입구쪽에서 바라 본 모감주나무군락
▲ 입구쪽에서 바라 본 모감주나무군락

천연기념물이란, 학술 및 관상적 가치가 높아 '문화재보호법'으로 지정된 동물, 식물, 지질, 광물 및 천연보호구역 등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말한다. 세계적으로 천연기념물이라는 용어는 1800년 독일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가 처음으로 'Naturdenkmal'이라는 말을 사용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말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산업혁명이 발전되어 자연파괴가 누적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부터이며, 자연파괴를 걱정하여 자연보호를 외치게 된 것은 거의 같은 시기의 영국, 미국, 독일에서였다.

모감주나무군락을 설명해주는 표지판
▲ 모감주나무군락과 숲에 대해 설명해주는 표지판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8월 9일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 고적·명승·보물·천연기념물 보전령'이 공포되고 다음 해부터 천연기념물을 지정했다. 그러다가 정식적으로 1962년 우리 정부가 '문화재보호법'을 새로 제정·공포할 때까지 효력을 발생했다. 대구광역시 도동에 위치한 향산(160m)의 '측백나무 숲'이 우리나라 천연기념을 제1호이다. 그 후 현재까지 문화재보호법에 근거하여 지정된 천연기념물은 552점쯤 된다고 한다.

모감주나무에 번호표를 달아 놓고 관리하고 있다
▲ 모감주나무에 번호표를 달아 놓고 관리하고 있다

방포항에 있는 모감주나무 군락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모감주나무는 주로 중국에서 자란다고 알려져 있어 중국 내륙에서 자라던 나무의 종자가 해류에 밀려와 군락을 이루게 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서해안은 물론 동해의 영일만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나무라고도 한다. 마을에서는 무학대사가 자신이 지은 사찰로 인하여 밤에 배들이 좌초되자 죽은 선원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다가 염주 줄이 끊어졌는데 그 염주가 지금의 모감주나무군락을 이루었다고도 한다.

모감주나무가 처음 자리 잡은 곳에 비석으로 표시를 했다
▲ 모감주나무가 처음 자리 잡은 곳에 비석으로 표시를 했다

안면도의 모감주나무 군락은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자연적으로 자라고 있고 흔히 볼 수 없는 나무이므로, 학술적 연구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모감주나무군락의 길이는 약 120m, 폭은 약 15m로 바닥은 자갈로 덮여 있으며, 높이 2~3m쯤 되는 나무가 400~500그루 정도 자라고 있어 마치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의 역할을 한다. 모감주나무는 본래 교목이지만 이곳은 바닷바람으로 인하여 생장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관목 상태로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모감주나무군락의 주변에는 갬핑장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 모감주나무군락의 주변에는 갬핑장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방포항 맞은편은 ‘꽃지’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방문했을 만큼 유명한 꽃지 마을에는 2002년 국제 꽃박람회가 열린 '국제꽃전시장'과 ‘꽃지해수욕장’ 그리고 애달픈 부부의 사랑을 간직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있다. 신라 흥덕왕(9세기) 때 전쟁터에 나간 남편 승언 장수를 기다리다가 아내는 망부석이 되어 할미바위가 되었고, 훗날 전쟁터에서 돌아온 승언 장수는 망부석이 된 아내를 지켜주기 위해 옆에서 할아비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뭉클한 이야기다. 저녁이 되면 고단한 부부의 사랑을 위해서 붉은 황금색 양탄자를 바다에 깔아주는 석양의 배려가 눈부시게 황홀하다.

방포항 젓개마을과 꽃지마을을 이어주는 꽃다리
▲ 방포항 젓개마을과 꽃지마을을 이어주는 꽃다리

방포항과 꽃지를 이어주는 ‘꽃다리’는 형이하학적인 모습으로 하나의 풍경이 되어 또 다른 풍경을 추론하도록 유혹한다. 꽃다리를 건너가는 시간은 5분도 채 안 걸리지만 꽃다리 위에서 주변의 풍경을 담아두기에는 한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너편 풍경을 훔쳐오는 다리가 아니다. 꽃다리를 건너는 이야기는 모감주나무의 신묘한 마법으로 꽃들의 땅과 해변의 모래로 이어지는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에까지 잇닿아 있다. 그래서 꽃다리는 구분된 경계를 잇는 다리가 아니라 풍경의 이야기가 교류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꽃다리에서 바라 본 꽃지해변
▲ 꽃다리에서 바라 본 꽃지해변

6월이면 신록(新綠)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주변의 꽃과 나무들은 가지를 키우고 잎을 확장시키면서 자신만의 공간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지만, 모감주나무는 꽃피우는 일을 서두르지 않는다. 초록의 잎에 이슬이 머물다 갈 공간만 조금씩 넓히고 꽃대의 기본 틀만 잡으면서 흔들리는 바람에도 고요하다. 여름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7월 달이 되면 고요하던 모감주나무 가지의 잎 주변에서 노란 물감들이 꽃대를 타고 온통 노란 꽃으로 나무의 우듬지까지 덮어버린다. 바람이 불어오는 날 멀리서 보면 노란 고깔을 쓰고 승무춤을 추듯이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 모습을 본 외국인들이 감탄사를 남발하면서 “놀라운 황금 꽃(wonderful, golden flower)”이라고 한다. 이처럼 꽃이 피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꽃이 지는 모습은 더욱더 정겹다.

마치 하늘에서 황금비가 내리듯이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에서, 인간의 탐욕스러운 마음을 바라보는 부처의 눈물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황금색으로 핀 모감주나무 꽃
▲ 황금색으로 핀 모감주나무 꽃

모감주나무의 꽃이 황금비처럼 땅 위로 떨어지고 나면 꽃의 자리에 여기저기 원뿔을 거꾸로 세운 것 같은 열매가 열린다. 청사초롱이 연상되는 특별한 모양은, 처음에는 초록색이지만 차츰 갈색으로 변한다. 그러면서 얇은 종이 같은 껍질이 셋으로 길게 갈라지고 안에는 콩알 굵기만 한 검은색 윤기가 자르르한 씨앗이 보통 세 개씩 들어 있다. 만질수록 반질반질해지므로 염주의 재료로 안성맞춤이다. 모감주나무의 열매로 스님들의 염주를 만드는데 그 귀한 가치 때문인지 큰스님들이나 지닐 수 있다고 한다. 모감주나무의 씨앗은 부처의 가르침처럼 귀하고, 도를 찾는 스님들의 수행처럼 오랜 시간의 인내로 가치를 만들어간다.

모감주나무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안내판
▲ 모감주나무의 유래를 설명해주는 안내판

모감주나무군락의 끝 자락에 위치한 바다목장체험관
▲ 모감주나무군락의 끝 자락에 위치한 바다목장체험관

모감주나무 씨앗의 다른 이름은 금강자(金剛子)인데, 금강석의 단단하고 변치 않는 특성을 가진 열매라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도를 깨우치고 지덕이 굳으며, 단단하여 모든 번뇌를 깨뜨릴 수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무학대사가 젓개마을 산 중턱에서 절을 짓고 도를 닦으면서 마주 보았던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는 그대로 있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의 변하지 않는 애틋한 사랑은 금강석보다 단단하여 번뇌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기에  무학대사는 금강자로 만든 자신의 염주를 이곳에 심었고 시간이 흘러서 모감주나무군락을 이루었다는 구전이 믿음직스럽다.

모감주나무군락에서 바라 본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 모감주나무군락에서 바라 본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

무학대사가 걸었을 방포항의 곳곳을 걸어보니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번뇌를 깨뜨린 마을 주민들의 얼굴은 부처의 얼굴처럼 자애롭다. 모감주 나무군락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천연기념물처럼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은 신묘한 풍경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이 아닐까?

충남 파이팅 !! 태안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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