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백고지와 백령성의 안내표지가 서 있는 주차장, 길은 가파르고 비를 품은 하늘은 흐리다
초등학교 시절, ‘반공방첩’이란 말은 익숙했다. 교과서에 나온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던 주인공 이승복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우리는 해마다 반공방첩 포스터를 그렸다. 좀 더 자극적으로 원색의 크레용을 사용하면서 공산당은 곧 사람이 아닌 괴물이나 악마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
▲육백고지전승탑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길
1950년 6월 한국전쟁이후 보통 1956년부터 1964년 사이에 태어난 출생자들이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나 역시 그 세대이면서 정치·경제·사회적으로 현역 기성세대에서 막 빠져나온 세대이기도 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의 내게 당시 40대 이상 남성중년 ‘라떼’들의 군대이야기는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 같았다. 일반 병사의 복무기한이 3년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격렬한 전투 경험이 없었어도 그 시간을 견뎌온 것에 대해 격려의 박수를 보낼 일이다.
▲충혼비와 육백고지참전공적비
▲육백고지 전승탑
빨치산은 영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온 말로 정규부대에 속하지 않은 무장 전사들을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은 금산의 백암산을 요새화하였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동족끼리의 격전이 벌어지면서 공비토벌 작전으로 빨치산뿐만 아니라 민간인 경찰, 군인 등이 피를 흘렸다. 그 격전의 현장이 육백고지이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서 전승탑과 충혼비, 공적비가 1991년 3월 25일 건립되었다.
▲금산 백령성비
전승탑이 있는 뒤에는 백제시대의 산성인 백령성이 보인다. 성곽 일부가 그대로 보이기도 하는 백령성은 1990년 5월 24일 충청남도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성은 돌을 쌓아 지어진 것으로 위아래가 가파르다.
▲전승탑 뒤로 보이는 백령성의 성곽 일부
▲백령성 아래 첩첩 굽이진 산
백령성은 금산군의 외곽성으로 백제말기 신라와 접경지대에 있으면서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비탈길 둘레 207m의 작은 성에서 당시 백제가 신라의 침입을 막는데 이곳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란 걸 짐작케 한다.
▲백령성 발굴조사 안내문
▲백령성발굴조사지역
매트가 깔려 있는 곳의 ‘안내문’을 읽어보니 지난해 7월 27일~11월 13일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였단다.
▲백제시대 사용된 성벽 돌들이 덮여 있다
‘금산군에서 추진하는 백령성 정비와 복원을 위한 학술발굴조사의 일환으로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에서 발굴조사 후에 지도위원희의 결과 국가 비귀속 유물 약 8,300여점을 매몰한 곳’이라고 하니 장중한 느낌이다.
안내표지로 설명된 ‘금산 백령성 목곽고’는 ‘주변 산성들과 함께 백제와 신라의 전황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목곽고의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고, 내부에서는 백령성과 관련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금산군에서는 목곽고 보존처리를 통해 군민들에게 전시될 수 있도록 현재 보존처리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2028년 금산 역사박물관에서 목곽고가 전시되는 날까지 기다려주세요!’
▲내려가는 길
지금의 평화가 있기까지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던 백령성과, 천혜의 요새 600고지. 내려가는 길이 가파르다. 고대 삼국시대부터 가깝게는 한국전쟁까지 국경을 지키고자 했던 그들의 신념과 격렬한 전투의 역사가 있는 곳, 걸음을 뗄 때마다 호흡이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