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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추사' 보러 갔다가 '완당' 보고 왔어요

예산 추사고택과 추사기념관

2021.02.18(목) 20:56:02 | 안개비 (이메일주소:hae041@naver.com
               	hae041@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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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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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가 그려진 부채
 
얼마 전 선물로 받았던 부채를 폅니다. 무심히 봐 넘겼던 그림이 '국보'라 하여 다시 보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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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국보 제180호)
 
추사가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과거 권력 핵심에 있을 때 주변을 맴돌던 이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변함없던 제자 '이상적'의 정성에 답하여 그의 나이 59세에 그려준 생애 최고의 명작이라고 합니다.
 
글의 내용은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 쓸쓸한 이 마음이여! 완당 노인이 쓰다'라고 하는데, 그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여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였는데, 추사의 그림에 '완당(阮堂)'이라는 호가 적혀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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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의 만남
 
24세에 친부를 따라 청나라 연경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최고의 석학이었던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사제지간의 연을 맺었으며, 완원의 제자라는 의미로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추사라는 호는 이미 사용하고 있었고요. 우리에게는 추사라는 글씨체로 널리 알려졌지만, 선생은 완당이라는 호를 더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을까요?
 
이제 추사 김정희 선생의 흔적을 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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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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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충남 예산 추사기념관에 도착하면 기념관과 고택이 좌우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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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이정표
 
추사기념관과 고택, 그 옆의 화순옹주 홍문, 백송공원 그리고 용궁리 백송까지 모두 만나 보시길 추천합니다. 거기에 추사체험관에서 체험까지 할 수 있다면, 조선 후기 역사 여행으로는 최고로 멋진 하루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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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추사기념관을 둘러본 후 고택을 향합니다. 훼손되었던 정문은 '화순옹주 홍문'을 기초하여 복원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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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추사의 출생 이야기가 담긴 우물로, 선생이 태어나기 전 우물이 마르고 뒷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24개월 만에 어머니 유씨가 김정희 선생을 낳자 물이 샘솟고 나무들도 생기를 찾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믿기에는 좀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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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추사고택 전경
 
고택에 들어서니, 폐가처럼 방치되었던 사랑채와 안채로 보이는 70년대 사진이 고택 내에 전시되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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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추사고택
 
지금의 모습을 보니 비슷하나요?
 
추사 김정희 선생은 영조의 부마인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조선 후기 소위 뼈대 있는 집안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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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그런 배경도 있었지만, 7세에 쓴 춘서첩(春書帖)이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마음을 쏙 빼놓았고, 이내 자청하여 스승이 되겠다고 한 이야기가 전해지듯 어린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 글솜씨를 보아서도 당시에는 추사의 앞날이 순탄하리라 생각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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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와 해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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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8살에 큰집으로 입양되었고, 10대 초반 양부가 돌아가시자 집안 장손의 무게를 안고 살았으며, 16세에 친어머니를 잃었고, 20세에 첫 부인을 잃었습니다. 24세에 청나라의 큰 스승을 만나고 귀국한 후 학문이 더욱 깊어졌고,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등 옛 비문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금석학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조금은 늦은 34세에 대과에 급제한 후로 승승장구하는 듯하였으나, 정쟁에 휘말리면서 생애 두 번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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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유배지 모형
 
제주도 유배생활에 몹시 힘들어 하던 중에도 멀리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던 둘째 부인마저 잃었으며, 그 후 노년에 과천으로 옮겨와 자칭 '과천노인'이라 칭하며 여생을 마친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시기가 추사의 역작인 세한도를 비롯하여 인생과 예술 모두가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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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금육경(사랑채 현판)
 
하나의 거문고와 여섯 경전, 즉 '군자는 책과 음악이 있으면 족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현판에는 노완(老阮)이라는 호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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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인장
 
김정희 선생은 추사(秋史) 외에도 완당, 노완, 노과 등 100여 개의 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많은 호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실력을 갖춘 자신감의 표현이지 않을까요? '추사'라는 호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는 스승 박제가가 청나라의 석학인 강추사와 교분이 있었고, 제자인 김정희를 알리면서 '조선에도 추사가 있다'라고 하였으며, 그 계기로 추사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1 ▲일로향실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한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에게 써 준 현판입니다. 초의선사와는 동갑내기로 40여 년의 우정을 나눈 사이라고 하는데, 친분이 그 정도면 차(茶)에 대하여도 대단한 수준이었으리라 짐작되네요. 글에서 화로 하나 있는 다실의 차의 향이 느껴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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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명문가 출신에 각 분야의 학문과 글, 그림으로 당대 최고였기에, 언제나 당당하였으나, 때론 자신감이 자만심으로 표출되기도 하였기에 주변의 많은 시기도 받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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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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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영실
 
고택 뒤편으로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 있습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가득 메운 추사의 삶은 그렇게 저물었지만, 그의 흔적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영원하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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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뒤편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券氣)'라는 말을 실행으로 옮긴 선생의 노년 작품들에서는 서툴게 보이면서도 빠져들게 만드는 조화가 있다고 합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살아간 추사 김정희 선생의 모습에서는 오래도록 아름다운 향기가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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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선생 묘
 
두 부인과 합장한 김정희 선생의 묘입니다. 세한도(歲寒圖)를 탄생시켰던 유배지의 소나무가 아닌, 평온함 속에 푸른 소나무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추사기념관
-소재: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추사고택로 249
-문의: 041-339-82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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