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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현대와 고대의 전쟁 이야기가 함께 서린 금산 배티재

2020.06.18(목) 07:54:46 | 대로 (이메일주소:dried@naver.com
               	dried@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어연 70년이 지났지만, 동족상잔의 아픔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더욱 깊어만 가는 요즈음입니다. 화해무드를 보였던 남북관계가 다시 날카로운 신경전으로 이어지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한반도와 전세계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육백고지 이야기를 한 번쯤은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치열했던 전투로 수천 명이 희생된 곳 금산 육백고지와 그 바로 위 백제와 신라의 투쟁이 담긴 백령성을 돌아 보았습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1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배티재 고갯마루 언덕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금산 백령성과 육백고지전승탑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2
 
주차장에는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는데 이름이 백령정이군요. 백령정 옆에 작은 매점에서 각종 음료와 간식 등을 팔고 있었습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3
 
그리고 이곳에 육백고지전승탑과 백령성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육백고지의 유래를 금산군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와 읽어 보았습니다.
 
'산의 동남쪽 역평리와 북서쪽 건천리는 한국전쟁에서 패배한 후 퇴로가 막힌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에 의해 백암산을 중심으로 마을 일대가 요새화됐던 땅이다. 특히 건천리는 지금도 북쪽으로 해발 350m의 오항고개를 넘거나 남동쪽으로 해발 360m의 배티재를 넘어야 마을로 들어갈 수 있는 천혜의 요새. 마을의 남쪽은 백암산과 선야봉이 연봉을 이루며 막아서고 그 나머지는 백암산 줄기가 마을의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선야봉 줄기가 마을의 서쪽을 둘러친 가운데 북쪽은 금남정맥이 흐르며 마을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오항고개, 배티재. 두 고개를 넘지 않고는 험준한 산을 넘어야 비로소 건천리에 닿을 수 있기 때문에 퇴로가 막혀 궁지에 몰린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곳은 없었을 터. 천혜의 요새와 같은 자연지형 덕에 백암산을 중심으로 건천리를 장악한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이 민간인과 경찰, 군인 합동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5년을 버틸 수 있었다.
 
1951년 5월, 마침내 우리 군은 민·경·군 3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백암산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빨치산과 그 동조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시작한다. 해발 650m의 백암산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는 시작됐고 이듬해 6월까지 1년 여의 지리한 싸움 끝에 양쪽 모두 많은 사상자를 내고 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 전투가 바로 금산에서 벌어진 공비토벌작전으로 민·경·군 호국용사들이 피 흘리며 격전을 벌인 육백고지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양쪽을 합쳐 모두 2,563명이 목숨을 잃어 씻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상흔이 남고 말았다. 빨치산 2,287명이 사살되고 1,025명이 생포되었으며, 경찰 184명·군인 20명·민간인 72명 등이 희생된 것.
 
1991년 3월 25일, 금산군은 배티재 고갯마루 언덕에 '육백고지전승탑'을 세우고 전승탑 앞으로 충혼비와 육백고지참전공적비를 나란히 세웠다. 육백고지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민·경·군에 대한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이 전투에 참여하여 고귀한 승리의 위업을 세운 군민의 향토방위 정신고취와 반공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하는 것이 전승탑·충혼비 건립의 또 다른 취지다.'

정말 치열하고 살벌했던 그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가슴을 저미게 하는군요.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4
 
이제 육백고지전승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가 봅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5
 
전승탑 계단을 오르니 전면 충혼비와 육백고지참전 공적비 뒤로 육백고지전승탑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6
 
육백고지 전승탑은 난공불락의 요새인 산을 상징하는 양쪽 구조물을 웅장하게 세우고 중앙에 영원히 펄럭이는 승리의 깃발을 당당하게 배치하여 두 산과 한 개의 깃발 탑신은 하나로 커다란 조화를 이루어 민·경·군이 삼위일체가 되어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는 뜻을 전체적인 조형물로 표현하였으며, 세 개의 탑신을 통한 통일감과 중앙 탑신의 세차례 굴곡은 변화와 고도의 긴장감을 형상화한 것이라 합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7

전승탑에 조성된 민·경·군 상의 모습입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8
 
전승탑에 조성된 민·경·군 상이 배티재 고갯마를 향하여 서 있습니다. 육백고지에서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에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다시는 이땅에 불행한 역사가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충청남도 기념물 83호로 지정된 백령성으로 올라가 봅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9
 
백령성을 지키는 듯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와 백령성지를 알리는 비석이 낯선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백령성은 백제시대에 견훤이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을 설치하고 금산의 서남방면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산성으로, 육백고지전승탑 뒷산에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10
 
금산 백령성은 성재산 꼭대기 백령에 쌓은 백제 말의 테뫼식 석성(산 꼭대기를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수평이 되게 쌓은 산성)입니다. 백제시대 백령은 금산군 제원면과 추부면을 지나 충북 영동과 옥천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백령성의 남동쪽 성벽은 산꼭대기를 지나고, 북쪽 성벽은 약간 내려와 전체적으로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모양입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11
 
성벽의 전체 둘레는 207m이며, 동벽 50m, 서벽 50m, 남벽 70m, 북벽 37m로 남벽에 비해 북벽의 길이가 짧은 평면 사다리꼴 형태입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12
 
2004년과 2005년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남문과 북문·치·보도·목곽고(목재로 만든 지하 저장시설)·건물지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이 산성은 백제 말에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백제의 멸망과 함께 폐기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방어 및 공격의 전초 기지로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백제시대 토기편과 글씨가 새겨진 명문기와 목재 그릇 등이 출토되어 금산문화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13
 
금산 백령성에서 내려다보면 남이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보입니다. 아, 정말 깊고 깊은 천연의 요새가 분명해 보입니다. 이곳에 숨어든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의 모습이 그려지는군요.
 
전쟁의 아픔이 새겨진 금산 육백고지와 백령성 14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일 뿐입니다. 멀리 대둔산도립공원을 배경으로 신록이 우거진 산줄기가 겹겹이 다가옵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금산 여행에서 꼭 빼놓지 말고 가보아야 할 곳, 금산의 육백고지와 백령성은 과거와 현재의 전쟁의 아픔이 혼재하여 새로운 교훈을 남기는 곳입니다.

6.25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찾아본 금산 육백고지에서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아픔이 계속되지 않기를 바라며 남북통일의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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