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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독립운동 전개의 신호탄

청산리전투 100주년·김좌진장군 서거 90주년기획④독립운동기지 건설 추진

2020.05.24(일) 18:32:11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김좌진이 투옥됐던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 김좌진이 투옥됐던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

  
민족운동가들과 교류 통해
군사학·군사전략 밑바탕 다져
위장활동거점 마련·자금모집
일제도 막지 못한 독립 열망

 
김좌진은 노비해방과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한 뒤 서울로 올라갔다. 대한제국이 처한 현실을 직접 보고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김좌진에게 서울생활은 신문물을 접하고 민족운동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시기였다. 김좌진은 윤치성(尹致性)·노백린(盧伯麟)·유동열(柳東說)·이갑(李甲) 등 주로 신민회원들과 교류했다.

이들은 사관학교 출신이거나 대한제국 군인이었다. 김좌진은 이들과 교류하며 군사학과 군사전략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했다.

김좌진은 국망이 되자 독립운동기지건설을 추진하며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제 국권회복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이라는 절대명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김좌진은 서울 관수동과 소립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과 영창상행(永昌商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설치했다.

이들 상점은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한 활동거점이었다. 위장상점은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비밀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신의주에는 염직회사(染織會社)를 설립했다.

만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경지역에 거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좌진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 했던 곳은 서간도였다. 따라서 국내와 서간도의 길목인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차려 활동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김좌진은 위장상점을 설치한 후 자금모집을 시작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좌진은 1910년 12월과 다음해 1월 부호들을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벌였다. 그러나 자금모집은 원활하지 못했고 1911년 4월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김좌진은 1911년 5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그에게 닥친 첫 번째 시련이었다. 홍성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권세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음에도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하면서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그를 철창에 가둘 수 있었으나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은 가두지 못했다. 김좌진은 1913년 형기를 마치고 풀려났으며 고향 홍성으로 돌아와 다시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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