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통합검색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화면컨트롤메뉴
인쇄하기

문화

항일투쟁의 정신 싹 틔우다

청산리전투 100주년, 김좌진 장군서거90주년 기획 ②항일의식의형성과 노비해방

2020.05.06(수) 02:18:57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백야 김좌진은 김복한 장군이 이끌었던 홍주의병 전투를 보며 항일 투쟁 정신을 일깨웠다. 사진은 홍주의병전투지였던 홍주성 조양문.

▲ 백야 김좌진은 김복한 장군이 이끌었던 홍주의병 전투를 보며 항일 투쟁 정신을 일깨웠다. 사진은 홍주의병전투지였던 홍주성 조양문.



민족운동의 출발점 ‘노비해방’
홍주의병 보며 항일의식 함양
의병장 김복한의 가르침으로
실력양성·무장투쟁 중요성인식

 
김좌진은 홍성에서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집안 노비부터 해방했다. 노비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러나 신분 질서는 남았고, 노비는 여전히 하층민으로 존재했다. 김좌진은 집안의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뒤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토지를 나눠줬다.

노비해방 시기는 1904~1905년 사이로, 그의 나이 15~16세 되던 해였다. 10대 가장의 결정으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에게는 장손으로서 조상대대로 전해지는 재산을 보존할 의무가 있었다.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많은 자금이 필요하리라는 것도 예견할 수있었다.

그러나 김좌진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빈부귀천의 철폐와 인간평등의 실현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인식했다.

그는 일제의 침략과 속박으로부터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이 집안에 노비를 거느리고 그들을 속박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노비해방은 그의 민족운동의 출발이었다.

김좌진이 항일의식을 갖게 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홍주의병이다. 일제는1894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후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1895년에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 승리한 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홍주의병은 이러한 일제 침략에 맞서 무력으로 항쟁했던 대표적인 항일투쟁이었다. 홍주의병은홍성·예산·청양 등 충남 서북부지역을 중심으로 1896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봉기했다.

홍주의병이 봉기했던 1906년은 김좌진이 17세 되던 해였다. 김좌진은 홍주의병에 참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홍주의병의 치열한 항일투쟁을 목격했고, 홍주의병은 김좌진의항일의식을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일본군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한 홍주의병의 처참함은 실력양성뿐만 아니라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였다.

더욱이 김좌진은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김복한은 홍성지역 안동김씨 대종손으로 홍주의병의 총수였으며 3.1운동 후 파리장서운동을 펼쳤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김좌진은 김복한으로부터 가문의 전통인 의리정신과 항일투쟁의 정신을 배웠고, 이는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배경이었다.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도정신문님의 다른 기사 보기

제4유형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4유형: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댓글 작성 폼

댓글작성

충남넷 카카오톡 네이버

* 충청남도 홈페이지 또는 SNS사이트에 로그인 후 작성이 가능합니다.

불건전 댓글에 대해서 사전통보없이 관리자에 의해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