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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2020.01.16(목) 21:59:24 | 네잎클로버 (이메일주소:venusmi8@hanmail.net
               	venusmi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뜨거운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인데요, 겨울 방학을 이용해 독립기념관으로 역사탐방 나들이 떠나보는 건 어떨까요?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 조국의 광복을 위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투쟁과 나라사랑 정신으로 국난을 극복해왔습니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의병장 정용기 선생을 202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1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뒤편에는 1관부터 7관까지 실내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5관과 6관 통로 사이의 야외 기획전시장에는 '2020 이달의 독립운동가' 12분이 선정되어 있는데요, 특별기획전시장에서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정용기 선생의 삶을 잠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2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3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었던 구한말, 우리 민족은 의병전쟁과 계몽운동, 안중근 의사로 대표되는 의열사들의 투쟁으로 일제에 저항하며 국권을 수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의병항쟁은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을 계기로 시작되었는데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단발령이 공포되자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국왕의 명령으로 해산했던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1907년,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와 국권피탈 이후 국내에서 투쟁 기반을 잃은 의병들은 간도와 연해주로 근거지를 이동하면서 독립군 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2018년 독립기념관 야외사진전 출처
▲2018년 독립기념관 야외사진전 출처
 
정환직, 정용기 선생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충효재 (독립기념관 출처)
▲정환직, 정용기 선생의 충효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충효재 (독립기념관 출처)

1. 산남 의병장  정용기 선생!
   (1862.12.13~1907.9.2)
 
1906년 의병투쟁의 중심에는 산남 의병장 정용기 선생이 있었습니다. 정용기 선생은 충절의 가문으로 잘 알려진 영일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요, 1862년 지금의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에서 아버지 정환직과 어머니 여강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친이  벼슬에 오르기 전까지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공부를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라 전국 각지를 전전하였지만, 1887년 부친 정환직이 '태의원 전의'라는 관직에 오르자 함께 상경하였습니다. 태의원은 당시 왕족과 궁중에서 쓰이는 약을 조제하던 관청이며 전의는 그 일을 담당하던 벼슬입니다. 하지만, 부친 정환직은 의술과는 상관없이 삼남지방의 시찰 업무를 주로 하였고, 이듬해인 1888년에는 의금부도사 겸 중추원 의관과 북부도사(5품관)로 품계가 올랐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4
 
'짐망화천지수전세비'  (독립기념관 출처)
▲'짐망화천지수전세비'(출처 독립기념관)

2. 부친 정환직이 고종의 밀지를 받들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뿐만 아니라 국정의 모든 분야까지 일제에 간섭받게 되었습니다. 이때, 고종은 통감부와 친일 인물들의 감시 속에서도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하여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밀지를 내렸는데요, 정환직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바로  관직에서 물러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정용기 선생은 천성이 활달하고 용력이 뛰어났으며 정의감이 투철했다고 전해지는데요, 부친 정환직의 계획을 듣고 함께 직접 나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부친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흘 밤낮을 간청하여 결국 승낙을 받았고, 아버지의 분부대로 의병을 모으기 위해 고향 영천으로 내려왔습니다. 
  
구한말 의병부대 모습 (1906년)
▲구한말 의병부대 모습 (1906년)

3. 산남의진 대장으로 의병투쟁을 이끌다!

부친의 뜻을 받들어 영천으로 내려온 정용기 선생은 1906년 1월경 '영천창의소'를 설치하여 의병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각종 통문이나 격려문, 광고문을 배포하며 그 누구를 막론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의병으로 나설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전국 각지에서 관군과 의병, 무장 농민군의 활동으로 인해 사회가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1906년 2월, 선생은 1000여 명 의병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었고, 진호를 '산남의진(山南義陳)'으로 정하고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산남'이란 영남을 가리키는 말로 '산남의진'은 정환직을 총수, 정용기를 대장으로 고종황제의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받아 영천을 중심으로 거병한 의병부대를 말합니다.    
   
의병이 사용한 무기
▲의병이 사용한 무기
 
정용기 선생은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치기 위해 진군하던 중 1906년 4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경주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관군의 계략으로 결국 선생은 경주 진위대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정용기 선생의 체포로 구심점을 잃으면서 산남의진은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 통문 (1907. 2. 21)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 통문(1907.2.21.)

4. 영천군 국채보상운동을 이끈 정용기 선생,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키다!
 
1907년 2월, 대구에서는 김광제·서상돈 선생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는데요,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만든 외채 1300만 원을 우리 국민의 손으로 갚고자 한 경제적 민족운동으로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4개월 동안의 고초와 시달림을 겪고  풀려난 선생은 국채보상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 활동하며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습니다. 1907년 봄이 되자 선생은 다시 산남의진을 조직하였고, 7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포항·청하·영천 등의 전투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1907년 9월 입암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해 정용기 선생과 핵심 참모진이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는데요, 이후 산남의진은 아버지 정환직이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이끌었고 정부에서는 정용기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진중일지',  입암전투 관련 내용
▲'진중일지', 입암전투 관련 내용

독립기념관
-위치: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
-전시내용: 1월의 독립운동가 정용기 선생 관련자료 (충효재 사진 등 7점)
-전시기간: 2020년 1월 1일 ~ 1월 31일 (한 달간)
-전시장소: 독립기념관 야외 특별기획전시장(제5·6관 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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