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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

홍산관아에 서린 동학농민군의 원혼

2019.10.17(목) 13:30:16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지금의 부여군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에는 부여현, 홍산현, 석성현, 임천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부여지방에 동학이 언제 전래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없다. 다만 부여는 충청감영이 있던공주에 접해 있었고, 공주에는 가섭암이 있어 해월 최시형이이곳에 은거하면서 충청과 전라도지방에 동학을 포덕하였던점을 감안하면, 1880년대 중반에는 부여에도 동학이 널리 전래되었을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부여지방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는 부여 유생 이복영이 남긴 <남유수록>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남유수록>에 의하면 1894년 6월말 무렵부터 부여대방면에 집강소가 설치되었고, 집강소를 통해 주요한 지방 행정이 집행되었던 사실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결과, 전라도지방에서는각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농민 중심의 자치행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지방에서도 집강소가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부여 대방면의 집강소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부여지방에는 동학조직이 매우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의 대표적인 접주는 이석보, 장봉한, 최천순 등이었다. 1894년 9월 최시형의 기포령이 떨어지자 부여의 동학농민군은 부여관아에서무기를 탈취하고 무장하여 논산으로 향하였다. 논산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와 결합한 부여의 농민군은 공주 우금티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밖에유생 이유상은 부여에서 조직한 의병을 이끌고 전봉준을 만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였다. 유생이던이유상이 동학농민군에가담했던 것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볼모로 잡으면서 나라를 위협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이유상의 모습은 나라와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올바른 유생이라면누구나 할 수 있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후 이유상은일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했던 동학농민군의 선봉장으로 우금티 전투에 참전하였다.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하자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흩어지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때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천에서 동학농민군이크게 일어났다. 

그러자 관군은 서천의 동학농민군을 치기 위해 서산군수 성하영에게 경리청군을 주어 파견하였다. 서천으로 향하던 경리청군이 부여에 이르자 부여에서는 동학군의 잔당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유회군이 조직되었다. 유회군은경리청군을 도와 부여, 임천, 홍산을 거치면서 부여지방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들은 부여지방 곳곳을 뒤져 닥치는 대로 동학농민군을 잡아 죽였다. 그래서 지금도 홍산관아에는 그때 죽음을 당한 동학농민군의 원혼이서려 있다. 
/(사) 당진시동학농민혁명승전목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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