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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100년 박해의 아픔이 서려 있는 홍주성지순례길을 거닐다!

홍주성지순례길에서 만난 순교터 6곳

2019.10.15(화) 14:29:00 | 네잎클로버 (이메일주소:venusmi8@hanmail.net
               	venusmi8@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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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
 
홍주성이라 불리는 홍주읍성은 천년 홍주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입니다. 고려 초에는 홍성 일대를 운주라 불렀고, 현종 9년인 1018년에 홍주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습니다. 1914년에는 우리나라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홍주와 결성 지역을 합쳐 홍성이라 부르게 되었는데요, 홍성 여행을 하다 보면 발길 닿는 곳마다 유구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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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해안 중심에 위치하고 있던 홍주는 충청도 4대고을 중 한 곳이었습니다. 내포의 중심이었던 홍주는 임진왜란 때에는 전략적 요충지로, 구한말에는 일제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홍주의병 항쟁이 있었던 곳입니다. 홍주성을 처음 쌓은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에 축성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 때에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석성 양식에 따라 고쳐 지었고, 홍주읍성도 새로 쌓아 문종 1년인 1451년에 완성하였습니다. 홍주성을 걷다 보면 4m 높이의 석축을 만날 수 있는데요, 홍주성의 원래 성곽길이는 1,772m로 현재는 약 810m의 성벽만이 오랜 세월의 흐름을 말없이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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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 남문, 사적 제231호(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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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인접한 내포지방은 지리적 특성상 천주교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습니다. 홍성군을 비롯한 예산, 서산, 보령 지방 등의 내포지방은 일찍부터 많은 천주교 신자가 생겨 탄압을 받은 곳인데요, 내포지방에 천주교가 계속 확산되자 정조 11년(1787)부터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4대 박해를 당하면서 1886년 한불수교조약으로 천주교를 인정할 때까지 약 100여 년에 걸쳐 박해의 역사가 지속되었습니다. 특히, 병인박해는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이어져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는데요, 홍주성지는 기록상 212명의 순교자가 나온 곳으로 순교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무명의 순교자까지 합하면 그 수는 약 천여 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홍성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가 많이 나온 곳으로 그중, 4명의 순교자(원시장 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황일광 시몬)가 2014년 8월 16일,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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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도지정기념물 제171호
 
홍주성지순례길
①동헌->②감옥터->③진영->④저잣거리->⑤참수터->⑥ 생매장터

홍주성지는 증거터, 옥사,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 등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홍성군청이 자리하고 있는 홍주읍성에서부터 걸어도 한 시간이면 증거터와 순교터 6곳을 충분히 둘러볼 수 있는데요, 순교터 6곳은 모두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있어 순서와 상관없이 반대로 둘러보셔도 됩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홍주목 동헌을 시작으로 감옥터, 진영,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터 등으로 이어지는 홍주성지 순례지를 천천히 걸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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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증거터(목사의 동헌)
그 첫 번째 장소는 조선시대 홍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근민당입니다. 이곳은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고문과 문초를 받았던 곳입니다. 홍주성 안쪽에는 홍주목의 정문이이었던 홍주아문과 아름드리 오관리 느티나무, 홍성군청을 지나면 조선시대 동헌이었던 안회당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회당 앞에는 물 위 정자 여하정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이러한 고즈넉한 풍경 한편에는 가슴 아픈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서려 있습니다.
 
본래의 동헌(근민당)은 현존하는 동헌 (안회당)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요, 동헌이 있었던 근민당 자리에는 신앙증거터를 알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천주교 박해시대 때, 천주교 지도층 신자들이 끊임없이 가해지는 곤장과 주뢰형을 신앙으로 극복하였던 곳으로 순교 선조들의 숨결이 깊게 배어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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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동헌(안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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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순교터(감옥터)
성내에 자리한 홍주옥으로 들어서면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옥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형벌을 집행하기 전에 수용하는 시설로 감옥 또는 원옥이라고도 합니다. 홍주옥은 1872년 제작된 홍주 지도를 통해 원형 담장 안에 1개 동의 옥사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홍주성내 역사공원 조성 사업을 추진하면서 2012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였습니다.
 
홍주 감옥터는 충청도 최초의 순교자인 원시장 베드로가 동사로 순교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홍주감옥은 천주교 박해 기간 동안(1791~1869)에 희생당했던 홍주의 순교자 212명 중, 113명의 순교자가 탄생된 곳으로 이곳에서 교수형이 제일 많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홍주옥은 프랑스 선교사로 첫 번째, 두 번째 선교사였던 성 모방신부와 성 샤스뎅 신부가 1839년 기해박해 때 홍주관아에 자수하여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눈앞에 감옥터의 상황이 재현되어 있어 굶주림과 목마름, 질병, 괴롭힘 등 순교자들의 옥중 생활이 얼마나 비참했을지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미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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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앙증거터(홍주 진영)
홍성 시내 길 한복판에는 홍주읍성의 동문인 조양문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조양문은 홍주성의 문루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문으로, 조선 1870년(고종 7)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입니다. 1906년에는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일본인들에 의해 홍주성의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졌지만 조양문은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지킬 수 있었습니다.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다시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조양문 주변에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조양문 바로 앞쪽에는  홍주 진영의 동헌인 경사당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당시 진영을 관장하던 진영장(정 3품)은 군사권과 죄인을 잡는 토포사의 직임을 겸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천주교 박해 후기에는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 홍주 진영으로 끌려와 문초와 형벌이 이뤄졌고 가장 많은 피를 흘렸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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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성의 동문, 조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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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앙증거터(옛 저잣거리)
홍주 진영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신앙증거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 홍주성 안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고 번화했던 저잣거리(장터)입니다. 순교 선조들의 신앙과 애환이 깊게 배어 있는 홍주의 옛 저잣거리는 장이서는 날이면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고 하는데요, 천주교 박해시대 때에는 각처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목사나 진영장의 동헌으로 끌려가거나 옥살이를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순교 선조들은 관아로 끌려가거나 처형되기 전, 저잣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욕설, 돌팔매질 등의 무수한 조롱을 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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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참수터
북문교 건너 오른쪽 방향의 월계천변에는 홍주성지의 순교 5터인 참수터가 있습니다. 홍주성의 북문 밖인 월계천변은 예로부터 홍주의 처형지로 이용되어 온 곳인데요, 이곳은 일반적인 형장의 조건인 개천과 백사장이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였기 때문에 참수터로 이용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로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된 복자 황일광 시몬이 처음으로 이곳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병인박해 당시에는 유마르타가 참수형을 받았고, 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고결한 피를 흘리면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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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생매장터
순교 6터인 생매장터는 홍주의사총과 인접해 있습니다. 참수터에서 대교공원을 따라 걷다보면 십자가의 길을 만나게 되는데요, 바로 그곳에 생매장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끕니다. 이곳은 천주교 4대 박해 중, 최대 박해인 병인박해 때 체포되었던 많은 천주교인들을 수용할 감옥이 부족하자, 그 대응책으로 일부 천주교 신자들을 생매장한 역사적 아픔을 간직한 장소입니다. 월계천과 홍성천이 만나는 이곳은 가장 넓은 모래사장이 있어 죄인들을 생매장하거나 시신을 처리하기에 적합하였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평온함마저 감도는 일상 속 공간이지만 이곳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잔인한 형벌이 행해졌다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경건해지고 숙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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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길 (14개 조각상)

1866년에 일어난 병인박해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던 무진년 1868 년에 최법상(베드로), 김조이(루치아), 김조이(마리아), 원아나타시아 등이 바로 이 형벌로 순교하였습니다. 이들 네 분의 순교자들은 모두 홍주 원머리(현재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출신으로 한날한시에 체포되어 홍주성으로 끌려왔고, 혹독한 문초와 형벌에도 굳게 신앙을 증거하고, 하나의 구덩이에 들어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흙덩이를 받으면서 주님의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고 합니다. 박해시대 홍주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한 시신도 생매장터 인근에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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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를 간직한 순교터 6곳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요, 홍성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홍주성과 함께하는 천주교순례길을 찾아 잠시나마 의미있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홍주성지순례길을 돌아보는 순간만이라도 순교자들의 용덕과 숭고한 신앙을 기리고 이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것도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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