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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우금티의 배후엔 김기창 부대가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⑫청양지방 동학농민혁명

2019.09.26(목) 22:51:55 | 도정신문 (이메일주소:ktx@korea.kr
               	ktx@korea.kr)

 

 

 

청양에 동학이 언제 전래되었는지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홍양기사>에는 1894 8 선무사 정경원이 홍주를 방문해서 내포지방 동학 지도자를 소집하고 임금의 윤음을 전했는데, 이때 김기창이 정산의 대표 접주로 등장한다. 또한 <일본공사관 기록>에는 유진하를 청양의 접주로 기록하였다.  

청양지방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동학농민혁명이 소강 상태에 있던 7 7일의 사건이 있다. 동학도인 수백 명이 청양읍에서 ‘위국안민’을 내세우고 청양관아를 위협하는 집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894 6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키자 동학교주 최시형은 9 18 기포령을 내렸다.

그러자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공주로 모여들었다. 전라도에서 일어난 농민군과 보은, 청산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이 공주에 이르러 10 23 이인전투가 벌어졌다. 이인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 중에는 정산의 김기창 부대 1 명도 있었다.

정산이 공주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에 정산의 동학농민군은 공주의 서쪽을 전담하였다. 배후에 있는 정산이 불안했던 일본군은 11 3 정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김기창은 아들에게 통문을 보내 수천의 군사를 소집하게 하였다. 이때 정산의 동학농민군이 모인 곳은 오늘날 장평면 미당리의 미륵당이다. 미륵당에 모인 수천의 동학농민군은 11 8일과 9 우금티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니 우금티전투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은 전라도에서 출발한 농민군만큼이나 충청도의 농민군이 많았다는 사실을 있다.

우금티전투 결과는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고, 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때 김기창이 이끄는 정산의 동학농민군만은 흩어지지 않고 정산 건지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건지동은 지금의 목면 안심리로 정산의 동학대도소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관군의 기록인 <양호우선봉일기>에는 건지동의 모습을 “동학교도의 소굴로, 새벽과 저녁에 문을 열고 닫는 것이 마치 관부와 같이한다”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막강했다.

정산의 건지동이 이와 같으니 아무리 후퇴하는 동학농민군이라 해도 무작정 공격만 하기에는 배후가 서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관군은 내포에서 공주를 향하던 장위영군에게 건지동을 공격하여 위험 요소를 없애게 했다. 하지만 장위영군이 11 13 건지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산의 김기창 부대는 낌새를 알아채고 흩어진 뒤였다. 장위영군은 결국 남은 잔당이라고 100 명을 붙잡아 그중 10명을 처단하였다. 그렇게 청양의 동학농민혁명은 치열하게 싸웠다. 

/()당진시동학농민혁명승전목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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