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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이장 재임 장장 44년, 이런분 또 계신가요?

서천 판교면 복대2리 오세종 이장, 70년대부터 근대화 일구며 깡촌오지 탈바꿈

2016.10.18(화) 16:23:43 | 내사랑 충청도 (이메일주소:dbghksrnjs6874@hanmail.net
               	dbghksrnjs6874@hanmail.net)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장(里長)만 44년간(또는 그 이상) 맡고 계신분이 과연 몇분이나 될까.
장수 이장, 이건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다. 주변에서 서로 이장 하겠다는 사람이 나설수도 있고, 또한 능력이 안되거나 교체를 원하는 주민들이 있으면 당연히 이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더구나 월급이 있거나 돈 되는게 있는것도 아닌 직책.
그래서 무려 44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한 마을에서 이장을 맡으며 마을을 탈바꿈 시켰셨다면 이건 분명히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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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천군 판교면 복대2리.
가을 볕나락이 누렇게 익어가는 복대리 마을은 작고 아늑한 고향같은 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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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 앞에는 큰 느티나무 고목이 떡하니 서서 마을을 굳건히 지키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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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대2리 마을회관. 오늘 여기서 주인공이신 이 마을 이장님 오세종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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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회관에 들어서니 아주 깨끗한 사무실이 눈에 들어온다. 한눈에 봐도 오세종 이장님의 성격을 알수 있을것 같았다.
먼지 하나, 털끝 하나 방바닥에 없었고, 연세나 세대로 보아 당연히 회관에서 담배도 피우실법 한데 이 마을회관은 금연건물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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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 오세종 이장님.
어르신의 연세가 올해로 84세이시다. 이미 지난 197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이장으로 일하고 계시는데 총 재임기간만 자그만치 44년이다.
하지만 실제 마을 일에 관여하면서 일을 보기 시작한 것은 33세이던 1965년에 마을개발위원회 총무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니 그것까지 합하면 51년이나 되는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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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대2리의 역사를 한눈에 알수 있는 마을회관의 사진들. 대부분이 흑백인 이 사진들 속에는 마을이 그동안 걸어온 길, 성장과정, 변화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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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꼼꼼함을 바탕으로 마을을 이끌어 오시면서 소중한 기록들을 사진으로 남겨 이렇게 후세들이 보고 알수 있도록 마을회관에 잘 정리해 둔 것이다.

복대2리에는 현재 57세대 83명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평균연령은 65세. 그중에 93세이신 명로창 할아버지가 최고령이신데 놀라운 일은 이분이 직접 자동차 운전을 하시며 게이트볼도 치러 다니시는 강골이시란다.
이런 마을에서 거의 반세기 동안 이장직을 맡아 오시면서 마을의 모든 대소사, 행정, 복지 등 마을살림을 일궈 오셨다.

70년대 당시 마을의 초가지붕
▲ 70년대 당시 마을의 초가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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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찌드러진 가난'이라고 한 당시 농촌마을의 실상. 이런 마을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변모시켜 왔다.

1974년 마을회관 공동 터닦기
▲ 1974년 마을회관 공동 터닦기. 횃불까지 밝히며 야간작업을 하고 있다.

1975년 새마을회관 낙성식
▲ 1975년 마을회관 낙성식. 군청에서 지프차와 고급승용차까지 왔다.

주민들이 공동으로 마을 앞 길 쓸기를 하고 있다.
▲ 주민들이 공동으로 마을 앞 길 쓸기를 하고 있다.

1970년대에 본격적인 새마을운동이 벌어졌다.
‘조국 근대화’라는 바람이 불고 그 바람이 가장 강력하게 들이닥친 곳이 농촌이었다.
그때 농촌에 처음 등장한게 경운기였다.

당시 서천군 전체를 통틀어 한대도 없던 경운기를 군에 신청해, 일본에서 수입한 경운기를 서천군 최초로 배정받은게 바로 이 마을이란다. 물론 거기에는 오세종 이장님의 노력은 물론, 서천군에서 오 이장님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경운기는 논 5마지기(1000평) 값, 쌀 한말에 돈 3000원 하던 시절이니 경운기가 실로 엄청나게 비쌌던 때였다.
그때 경운기는 농촌에서 실로 혁명적인 기계였다. 소달구지가 짐을 나르고 ‘이랴, 이랴’ 하면서 소로 쟁기질을 하던 때에 기계가 밭을 갈고 탈곡도 하고 소독도 자동화로 하는 것이었으니 가히 농업의 신적인 존재였다.

오세종 이장님은 그것으로 마을을 일구기 시작했고 덕분에 마을은 나날이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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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이 가리키고 있는 4-H 현황판. 지금도 농촌마을에 있는 4-H란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S) 건강(HEALTH)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의 머리글자 네 개를 따서 각각 지(智) 덕(德) 노(努) 체(體)로 번역하여 사용한, 당시 농촌운동의 근간이었다.

4-H 운동을 바탕으로 마을사람들을 다같이 불러모아 경운기를 앞세우고 마을 길부터 넓혔다.
아울러 또 필요한게 도랑을 건널수 있는 다리였다. 여름철에 비만 오면 건너지도 못하고 농작물 운반도 어려웠던 농촌의 많은 도랑 곳곳에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다.
지붕개량 작업에도 속도를 냈다. 지금이야 슬레이트 지붕에 쓰이는 석면이 발암물질이라 해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지만 그때는 그것과 함석철판 지붕개량이 대세였다.
그 덕분에 마을의 초가지붕은 모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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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H 운동을 바탕으로 했던 또하나의 작업은 퇴비증산이다.
퇴비가 아닌 화학비료를 많이 쓸 경우 토양이 죽으며 작물이 웃자라고 알차지 못한다. 그것을 막으려면 풀과 짚을 발효시켜 만든 퇴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당시에는 정부가 나서서 퇴비를 많이 만든 마을엔 포상금을 줬는데 오세종 이장님은 마을에 이득이 되게 하고 우수 농작물도 생산하고 토양도 살리자는 차원에서 퇴비만들기 독려를 해서 상금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재미있는 에피소드.
그때는 마을이 공동참여 공동작업 형태였다. 누구랄것 없이 자발적으로 마을사람들 모두가 나서서 일을 했다. 그런데 개인사정이 있거나 몸이 아파서 공동작업에 참석을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때 오세종 이장님은 새마을 사업 공동작업에 불참한 사람들을 마이크로 호명했는데 당시 이장님의 아버지도 함께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척 어르신이 “어떻게 아버지 이름까지 부르냐”며 “김일성보다 더한 놈”이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을 건네시더란다.
공과 사를 구분해 불편부당함 없이 일 처리를 하는 오세종 이장님의 그 사건(?)을 목격한 마을 주민들의 이장님에 대한 신뢰도는 급상승했다고.

이렇게 앞만 보고 달리면서 새마을 운동에 매진한 결과 대통령 하사금까지 받게 되었고 그 돈으로 논 600평을 구입해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나학석씨에게 농사를 짓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논을 빌려주며 수익금의 절반씩 마을과 개인이 나누도록 약속한 것이다.
나씨는 오늘날로 말하면 저소득 차상위 가정이었는데 이장님은 이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겼다.

이장직을 수행하면서 고민도 많았다.
이장님댁 역시 농가이다 보니 일거리가 뻔한데 이장직을 맡느라 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86년에는 이장을 그만두려고 보령의 한전에 가서 전기 검침원으로 취업까지 했단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득달같이 쫓아와서 이장을 더 해달라고 통 사정하는 바람에 결국 6달만에 마을로 돌아갔다.

이장님이 재임중 가장 힘들었을때는 언제일까.

“그때는 돈도 없고 먹을게 많지 않아서 나물을 뜯어 먹었어요. 그런데 새마을 사업에 마을주민들이 동원돼 공동작업을 하다 보니 주민들이 나물 뜯을 시간을 뺏기는 겁니다. 그렇다고 자기만 나물을 뜯겠다며 공동작업에서 빠질수는 없고요. 그래서 주민들 일부가 밥을 굶는다는 말이 들렸어요. 그때 가장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 들으면 상상이 안가는 일이지만 그때 농촌에서의 처지는 다 비슷했다.
그렇게 어렵던 시절에조차 일사분란하게 밀어부쳐 오늘의 마을을 일구어 내신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마을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쏟은 덕분에 작년에는 2015년 새서천대상 사회봉사부문 수상자로 확정돼 군수표창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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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님이 만지고 있는 이것은 마을 주민들이 시시때때로 회관에 들르면 한푼두푼 동전을 집어넣는 이웃돕기용 복돼지란다.
이걸 뜯어서 해마다 이웃돕기에 활용하면서 좋은일을 하는데도 빠지지 않는다.

이제 올해로 이장직을 내려 놓으실거라며 마을 주민분들께 새 이장을 뽑아달라고 부탁하셨다. 부인께서 와병중이어서 병간호도 해야 하고, 연세도 많으셔서 더 이상 이장직을 수행하기 어렵다 하신다.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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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깜짝 놀랐다. 이장님이 신고 계신 신발, 검정 고무신이다. 요즘 시절에 검정고무신이라니...
평생을 검소하게, 44년간 이장직 맡으면서 마을기금 단 한푼도 사적으로 건드리지 않은 청렴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어렵던 시절에 조국 근대화를 위해 피땀흘린 우리 농촌의 어르신들, 그 역군들. 이장님도 그시절의 주인공이셨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나오면서 다시금 존경의 마음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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