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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태안군엔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그 시절 버스안내양 단상

2010.12.09(목) | 홍경석 (이메일주소:casj007@naver.com
               	casj007@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만 하더라도 중학교로 내처 진학하지 못 하는 아이들은 적지 않았다. 이는 그만큼 살기가 힘들었다는 반증의 아픔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론이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는 고향 죽마고우들 거개는 ‘가방 끈이 짧다’. 그것도 퍽이나.

한데 당연지사겠으되 아무튼 당시 고작 초졸 학력만으로 먹고 살 거(생업)라곤 그 ‘장르’가 몇 안 되었다. 그래서 누군 구둣방의 점원으로, 또 누구는 양복점의 이른바 ‘시다’로 들어가 흡사 전태일처럼 그렇게 매우 고달프고 아울러 힘겨운 나날을 감당해야만 했다. 남자들의 경우는 이랬지만 여자는 또 달랐다.

당시 천안에는 충남방적이란 아주 큰 공장이 있었다. 비교적 보수가 안정적이라는 평판이 돌았던 이 공장에 취업이 되는 건 겨우 초졸 학력만을 지닌 동네 누이들이 한결같은 어떤 로망이었다. 비록 답작답작한 누군가는 그들을 일컬어 소위 ‘공순이’라고 놀렸을망정. 그러나 공장엔 원한다고 하여 다 들어갈 수 없었기에 또 어떤 동네 누이는 시내버스 안내양으로 취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인 1974년 기준으로 서울의 버스안내양 일당은 1,000 원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한 하루 18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더하여 이른바 ‘삥땅을 막는다’는 구실로 안내양(들)에게 지금으로선 분명(!) 성폭력에 다름 아닌 검신(檢身)까지 자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당시 나처럼 못 살아서 중학교조차 못 간 절친한 친구의 여동생이 천안서 버스안내양으로 근무한 바 있다.

버스안내양의 직업병인 위장병과 무좀, 그리고 빈혈 따위에 시달리면서도 아무튼그렇게 힘들게 번 돈으로 자신과 오빠는 중학교조차 못 갔지만 동생들은 모두 잘 가르쳤으니 그만한 효녀가 세상에 또 있을까! 또한 지금은 그 시절 고생했던 나날들이 모두 자양분으로 작용하여 남부럽지 않게 잘 살고 있는데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지난 2006년 2월부터 충남 태안군에 버스안내양이 다시 부활했다.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라곤 하지만 어쨌든 태안군이 실시하는 이같은 제도는 그 시절 아릿했던 풍경과 추억까지를 덩달아 곱씹게 해 주는 그리움의 타래라 여겨졌다.

조만간 일이 있어 태안에 간다. 그렇다면 그 시절 버스안내양의 친절하고 살갑기까지 했던 반가운 고객응대의 외침이 아름다운 메아리로 되돌아올 것이라 여겨진다. “손님은 어디 가세유? 네, 이 버스 타시면 돼유.” 그러면서 버스안내양은 탕탕~ 소리도 요란하게 버스의 몸통을 칠 것이리라. 꾀꼬리 목소리의 “오라이~”를 갖다 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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