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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천년의 숲길'

2009.07.22(수) | 메아리 (이메일주소:okaban@naver.com
               	okaban@naver.com)

이 글은 충청남도 도민리포터의 글입니다. 충청남도 공식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산에서 공주방면 39번 국도를 따라 가면 아산시 송악면 유곡리에 있는 송악저수지를 지나 천년의 숲길 끝자락에 있는 고찰 봉곡사를 만날 수 있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송악저수지에는 가뭄으로 인해 물이 메말라있다(09년6월28일)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폭우가 내린뒤 송악저수지에는 물이 차오르고 있다(09년7월12일)

봉곡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여명이 밝아온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천년의 숲 입구에서 본 이른 아침의 여명

소나무 숲길 입구에 있는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는 그 아래에서 주민들이 해마다 정월 그믐날 저녁에 제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곳이라고 한다.  연인과 함께 혹은 가족나들이로 일상의 잡념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는 호젓한 분위기가 있는 아름다운 소나무숲길을 따라 솔향기를 맡으며 신라 때 창건됐다는 고즈넉한 고찰 봉곡사로 들어가 본다. 솔내음 향기 나는 아름다운 숲길에 들어서면 우리는 자연의 한 조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100년 쯤 된 노송이 많은 '천년의 숲길'

아름드리 서 있는 100년쯤 된 소나무의 자태와 그 노송길을 걷노라면 일상의 온갖 잡념도 사라지는 것 같다. 이른 아침에 무상무념으로 숲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이곳을 걷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자가 된 것 같다는 숲길을 따라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는 봉수산까지 오른다면, 그야말로 봉 잡은 것이다. 이곳은 생명의 숲 국민운동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한 소나무 숲이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천년의 숲길에서 뒤돌아 본 아침 햇살

그리고 '천년의 숲’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는 봉곡사로 가는 노송길은 아산의 12경에 포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전국에서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폭우가 내린뒤의  '천년의 숲길'

소나무는 늙어 갈수록 품(品)이 생겨난다고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전국 어디를 가나 노송에 남아 있는 V자 흉터를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의 노송도 예외 없이 일제시대의 아픈 흔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서 산기슭에 도착하면 드디어 봉곡사가 보인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만공스님이 처음 깨달은 성지(聖地) 봉곡사(鳳谷寺)

입구에는 조선말기 고승 만공스님이 도를 깨우친 절이라고 하여 이를 기리는 만공탑이 절 입구에 세워져 있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만공스님을 기리는 만공탑

 봉곡사는 신라말인 887년(진성왕 1)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구전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산 너머에서 절터를 닦고 목수들을 불러 재목을 다듬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들이 계속 밥을 물고 가기에 이상히 여겨 뒤를 따라가 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까마귀들은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그 터가 현재 닦고 있는 터보다 좋은지라, 이곳으로 절을 옮겨짓고 ‘석암’ 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온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암ㆍ벽련암ㆍ보조암ㆍ태화암 등의 산내암자가 있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산 이름인 봉수산과 걸맞게 사찰명도 ‘봉황이 깃드는 곳’이라 하여 봉서암이라 고쳤다.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46년(인조 24)에 중창하였고, 1794년(정조 18)에 경헌ㆍ각준 두 스님이 중수하여 현재의 이름인 봉곡사로 개칭하였다. 봉곡사에서 본 건물 중 특이한 것은 고방이었는데 고방은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로서 2층 형태로 되어 있으며 대웅전 옆의 80칸의 ‘ㅁ’자의 요사체 건물 중 일부라고 한다. 충청도 지방에 몇 동 남아 있지 않은 고방으로서 가치가 크게 인정되어, 현재 대웅전과 함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3호로 지정되어 있다.(전통사찰관광종합정보에서 일부 참조)

천년의 숲길을 따라 봉곡사 경내를 둘러보았으니 이제는 봉 잡으러 봉수산으로 올라선다. 육산인 듯 했는데 등산로에는 집체만한 바위들이 군데군데 나타나고 절터였음 직한 공터 옆 엔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많이 보인다. 깨끗하게 조성된 등산로를 따라 능선에 올라서면 바위군락이 나타난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바위가 마당처럼 넓고 그 바위 아래에는 굴이 있다

이곳에 마당처럼 넓고 큰 바위가 베틀바위다. 베틀바위 아래에는 굴이 있고 주위에는 사람 두세배 크기의 몽돌바위가 있다. 난리가 났을 때 주민들이 여기 있는 돌 돌 밑으로 피신해 베를 짰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베틀바위가 있다.

그 전설에 의하면 큰 전쟁이 있었던 당시 이 마을에는 극히 초라한 아낙네가 베를 짜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살아올지 기약 할 수 없는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그나마 어려운 살림에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아낙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오직 한 가닥 남편과의 재회를 믿으며 어려운 살림을 꾸려 갔으며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쟁의 열기도 점점 식어 갔다.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여인의 애타는 마음은 여러 해를 거듭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아낙네의 희망은 조금씩 꺼져 갔으며 이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가늠 할 수 없는 지경에도 아낙네는 남편의 생존만을 믿으며 온 정성을 다해 불공까지 드렸다. 하지만 세월은 아낙네의 머리를 백발로 덮었으며 이 풀 수 없는 한은 베틀에 담아져 지워지지 않는 염원만 바위로 변했다. 이 바위가 베틀과 흡사해 ‘베틀바위’라 칭하기도 하며 아낙네의 모든 정성과 남편을 만날 수 없는 한의 표상이라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노송의 기품 가득한 봉수산  
▲ 베틀바위 주위에 있는 사람 두세배 크기의 몽돌바위

천년의 숲길/봉곡사 찾아 가는 길은 아산에서 39번 국도를 따라 공주방면으로 송악저수지가 끝나는 지점에 송남휴게소를 500m쯤 지나 오른쪽으로 616번 지방도로 대술행 표지판과 함께 봉곡사 표지판이 있다. 이곳이 유곡1리 사기막 마을의 입구이다. 여기서 우회전하여 800m 정도 가다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봉곡사 표지판이 있다. [넷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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